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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② “전쟁 두달 전부터 평양 북쪽 탱크부대가 계속 남하했어…훈련인줄 알았지”

2015-06-26

[평양에서 온 남자의 6·25 기억 그리고 삶] 대구‘부산안면옥’ 방수영 대표

20150626
방수영씨(왼쪽)는 1953년 휴전 후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다. 사진은 자취시절 하숙집에서 찍은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 평양에서 찍은 사진을 한 장도 가져오지 못했다고 했다. 오른쪽 사진은 6·25전쟁 당시 국제연합 민사원조처 여수사무소에서 근무할 때의 모습. 빛이 바래고 찢어진 사진을 테이프로 붙여 얼굴이 흐릿하다. <방수영씨 제공>


20150626
방수영씨가 자신이 일군 부산안면옥 앞에서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다.

6·25전쟁 발발 직전
평양제7인민학교서
야간부 교사로 근무
교장이 떼준
재직증명서 덕분에
인민군의 징집 면해

외할머니는 평양에서
냉면집으로 유명
전란 중에도 장사

당시만 해도
공산당 지지 평양시민
그리 많지 않았다
시민 대부분은
전쟁이 나자
교외나 시골로 피란 가
평양은 텅 빈 도시였지

1.4후퇴 때 월남
대동강 하류로 가서
나룻배 타고 건너
예성강선 익사 위기도

◆광복 후 평양생활

방 대표의 외가에는 외삼촌 2명과 이모가 있었다. 큰외삼촌 안목천씨는 개성에 있는 송도고보를 졸업한 엘리트였지만 집에 자신의 방도 없을 정도로 객지생활을 하며 떠돌아다녔다. 말 그대로 ‘평양한량’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조카를 아껴주었다.

방 대표는 평양에 있는 남산소학교를 졸업하고 평양고보의 후신인 평양제2중학교에 입학했다. 평양제2중학교는 일제강점기 서울에 있는 경기고보에 이어 둘째로 생긴 관립학교였다. 삼남지역에서 셋째로 생긴 중등학교는 경북고의 전신인 대구고보다.

“공부를 꽤 잘했지. 중학교 2학년1학기 때 광복이 됐어. 소비에트군이 들어오고 공산당이 통치를 했는데, 공산당이 교명을 서광중학교로 개명한 뒤 평양제3중학교로 또 바꿨어. 그런데 졸업할 즈음에 다시 평양제1고급중학교로 했단 말이야. 3년 동안 교명을 세 번이나 바꿨는데 졸업생은 다 평양고보로 통해. 서울에서 매년 한 번 동창회를 하고 있지. 당시엔 정치적 상황이 무척 혼란스러웠던 걸로 기억해. 공산당이 지주의 재산을 몰수하고 토지를 국유화했지. 자기들 마음대로 한 거이지. 우리 외가는 땅이 없어 몰수될 것도 없었어. 안면옥은 그 와중에도 흥성했지.”

방 대표의 형은 오산중학교 4학년에 재학하던 중 1945년 11월23일 신의주에서 일어난 반공학생시위사건에 연루돼 졸업을 하지 못하고 평양제2중학교를 졸업했다. 형은 공산당에 요주의 인물로 찍혀 2년 뒤 월남했다. 그 뒤론 형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했다. 방 대표는 6·25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3월, 평양제7인민학교 야간부 교사로 근무했다. 당시 야간부에선 학교에 들어갈 나이에 입학할 시기를 놓친 아이들을 가르쳤다. 학령기를 놓친 사람을 모아 공부를 시킨다고 해서 ‘성인학교’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6·25전쟁과 피란생활

“20살 때 6·25전쟁이 터졌어. 내 기억으론 인민학교 운동장이 꽤 넓었는데, 전쟁발발 1~2달 전부터 북쪽에 있던 탱크부대가 계속 남하했더랬어. 해거름에 20~30대의 인민군 탱크가 운동장에 집결해 남쪽으로 갔는데 새벽이 되면 다 사라졌단말이야. 우리는 그저 탱크부대가 훈련하는가보다 했지.”

전쟁이 일어나자 방 대표에게 인민군에 입대하라는 징집영장이 나왔다. 그는 징집영장을 들고 교장에게 갔다. 교장은 인민학교 재직증명서를 떼어주면서 징집면제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해주었다.

“교사로서 가르치는 게 다 공산주의식 교육이었어. 선생으로서 가르쳐야 할 내용을 당에서 미리 정리해주었는데 그것을 벗어나면 안 돼. 기런 건 학생도 마찬가지야. 질문하고 대답할 분위기가 안됐단 말이지. 교사들이 인민군에 징집당하지 않았던 이유는 북쪽에 있는 교사를 확보해 통일 후 남쪽 아이들을 가르치겠다는 것 아니겠어.”

전쟁이 일어나고 4~5일이 지나자 평양에 미군폭격기의 공습이 시작됐다. 거리엔 인적이 끊기고 학생은 등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교사는 출근해 근무를 했다.

“이상한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폭격기가 오지 않으면 섭섭했어. 당시만 해도 공산당을 지지하는 평양 시민은 그리 많지 않았단 말이지. 시민은 다들 평양 교외나 시골로 내려가 도시는 그야말로 텅 비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에 진격하기 약 1주일 전부터 공산당원들이 피란을 갔어. 하루는 교장이 연병장에 30명이나 되는 교사를 다 모으더라고. 기런데 교감이란 사람이 소지품을 가방에 집어넣더니 얼굴이 사색이 돼 담을 넘어 도망가는 거이야. 교사들은 전황에 대해 몰랐는데 교장과 교감은 전황을 미리 알았던 게지. 기런데 나는 도망갈 데가 없더라고.”

방 전 대표는 평양시내에 있는 평양고보 선배의 집에 피신을 하기로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고 했다.

“한옥이었는데 마루 밑에 반지하실이 있더군. 기런데 그 선배 가족이 빼곡하게 다 피신해 있는 거야. 하루 이틀 숨어있어야 할 것도 아니라고 생각이 돼 외가에서 경영하던 제분공장으로 피신했지. 거기 3층에서 하룻밤을 유숙했더랬어. 낮엔 1층에서, 밤엔 3층에서 생활을 했지. 그러다 제분공장 일을 관리하던 직원과 조우를 했는데 ‘너는 여기에 있으면 죽는다. 내가 외할머니가 피란한 ‘칠골’(평안남도 대동군)로 데려다 줄 테니 가자’고 해서 가만히 있어도 죽고, 나가도 죽겠다 싶어 그분의 말을 따랐어. 그 양반이 리어카 짐칸에 나를 몰래 태우고 검문소 2~3개를 통과해 외할머니가 피란한 곳에 도착했지. 짐칸에서 금방 나오질 못하고 밤에 몰래 나와 곳간 땅굴에 숨었더랬어.”

방 대표는 그곳에서 머물다 일주일쯤 지나자 평양에 대포소리가 들리면서 국군이 진입한다는 소문이 쫙 돌았다고 했다.

“동네 청년들이 인민군 패잔병을 포로로 잡고 막 그랬어. 10월20일에 국군수색대가 제일 먼저 평양에 도착했는데 그때 다시 외할머니와 평양시내로 들어갔지. 전란 중에도 외할머니는 냉면집을 열었어. 그때 국군수색대원이 냉면을 먹으러 왔더군. 나는 외할아버지 집에 기거했지. 평양에선 동치미국물을 냉면국물로 썼는데 평양시 수옥리 6~12번지 한옥이 다 외할아버지 집이었어. 마당이 엄청 넓었지. 한 달 정도 있었는데 이제 살았다는 느낌이 드는 차에 다시 대포소리가 들리더군. 그러면서 사람들이 다시 내려오는 거야. 피란행렬이 줄을 이었지.”

12월에 들어서면서 중공군의 개입으로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유엔군의 후퇴가 시작되면서 수천 명의 피란민들이 폭파된 대동강 철교를 타고 남쪽으로 향했다. 방 대표는 외할머니를 평양에 남겨둔 채 두 외삼촌 내외, 이모와 함께 남쪽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대동강 철교를 넘으려고 사람들이 새카맣게 모였어. 그런데 우리는 용기가 없어 도저히 못 타고 가겠더라고. 그래서 대동강 하류로 걸어내려왔지. 나룻배라도 있으면 타고 넘어갈 요량이었는데 마침 운이 좋아 배를 발견했지. 기런데 뱃사공이 없더라고.”

◆월남 직후 남한에서

그는 사선을 넘어 부산에 도착했다. 개성에 있는 예성강을 건널 때 죽을 뻔하기도 했다. 그는 부산에 도착한 뒤 금정산에 위치한 국민방위군 사관학교(제3기)에 입교해 군사훈련을 받은 뒤 제주도 애월에 배속을 받았다. 국민방위군은 제2국민병역 해당자인 만 17세 이상 40세 미만의 장정으로 조직됐는데 후퇴를 하면서 굶주림과 추위로 9만여명이 사망했다. 방위군 수뇌부가 뇌물사건에 연루돼 5명이 사형을 당하면서 국민방위군은 1951년 4월에 해체됐다.

“제주도에서 약 5개월간 근무를 했는데 일생 중 가장 힘들었어. 제주도는 공비와 경찰간 전투가 심했지. 그런데 공군제10전투비행단이 영어통역관과 작전제도공을 모집한다는 방이 붙었더라고. 영어도 못 하고 제도도 안 해봤는데 면접관이 왜 왔냐고 하기에 ‘갈 데도, 밥 먹을 데도, 잘 데도 없어 왔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더니 합격시켜줬어. 그후 작전정보국에 배치돼 경남 사천에서 몇 달 근무했지. 마침 그때 여수에 있는 외삼촌과 기적적으로 연락이 닿아 유엔군 산하 국제연합 민사원조처 여수사무소에서 5년간 근무했어. 평양고보 선배가 수석통역관으로 있었는데 10명 중 3명이 미군이었지, 아마.”

방 대표는 그때 영어를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선배가 부러웠다. 그는 미군이 보던 타임지와 뉴스위크지를 보면서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했다. 이후 외삼촌의 도움으로 부산에 있던 경희대 전신인 신흥대에 입학해 1년간 다니다 서울에서 3년간 공부한 뒤 졸업했다.

“이모가 일본 유학파 출신이야. 부산남여자상업고 교사를 하다 부산여고에서 교장으로 퇴직했지. 난 대학 졸업 후 57년 부산에서 고등학교 시간강사, 전임강사를 거쳐 거창여고, 진주고, 부산남고, 경남고 등지서 10년간 영어를 가르쳤어. 기런데 그게 힘들더라고. 밤 9시에 퇴근하면 과외수업을 했어. 지금이야 고액과외다 뭐다 하지만 돈을 거의 안 받고 아이들을 가르쳤지. 일종의 야학인 셈이야.” W3면에 계속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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