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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7] 중국 내 경상도 마을

2015-10-06

“한국서 오셨니껴”…가본 적은 없어도 말투는 70여년 前 그대로

[디아스포라 .7] 중국 내 경상도 마을
일제강점기에 어쩔 수 없이 이주한 경상도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진 중국 길림성 알라디촌의 김치공장에서 조선족 여인들이 김치를 담가 비닐봉투에 담고 있다. 이곳에 사는 이들은 경상도 사투리는 물론, 집집마다 배추를 키워 겨울을 앞두고는 김장을 한다.
[디아스포라 .7] 중국 내 경상도 마을
경상도가 고향인 이들이 모여 사는 중국 길림성 알라디촌 출입구. 마을로 들어오는 쪽에는 ‘어서 오세요’, 나가는 쪽에는 ‘반갑습니다’‘또 오세요’라는 안내현수막이 한글로 내걸려 있다.

먹고살기 위해, 일본에 속거나 떠밀려 중국으로 내몰려 어쩔 수 없이 국적을 포기해야 했던 이들이 있다. 이들은 결국 대한민국 국적이 아닌 중국 55개의 소수민족 중 하나인 조선족으로, 그렇게 중국 사람이 되어버렸다. 현재 중국 내 조선족 인구는 183만명에 이른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만주사변(1931년) 이후 만주국을 만들었고, 이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당시 일본인 신분이던 조선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말을 듣지 않으면 끊임없이 부역을 부과했고, 졸지에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된 조선인들은 고향을 등지게 됐다. 1936년부터 1940년 사이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은 약 25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됐다. 이 중 길림성의 알라디촌, 흑룡강성의 홍신촌 등에는 경상도 사람들이 모여 ‘중국내 경상도 마을’을 만들어 이어오고 있다.

일본에 의해 중국 내 조선족이 되어버린 그들. 광복 70주년을 맞은 지금까지 그들은 조국을 찾지 못하고 있다. 국적 회복이 아니라 고향 방문조차 쉽지 않았던 시대는 지났지만 아버지, 어머니의 고향 땅을 밟은 이들을 편견의 눈으로 바라보는 우리네 시선 탓에 여전히 갇혀 살고 있다.

1936∼40년 만주 이주 25만 조선인
광복 후 귀향 못한 채 조선족의 삶
길림성 알라디촌 등 고향사람 모여
중국내 ‘경상도 마을’로 전통 이어

부모 세대 쓰던 말과 문화 그대로
한옥민속촌과 곳곳에 한글현수막
낯익은 고추문화축제·김치공장도
한국 묻힌 조상얘기엔 눈시울 붉혀

◆중국 내 경상도 마을 ‘알라디’

지난달 18일 오후 2시쯤 중국 길림성 길림시 용담구 우라가진 알라디촌.

길림시에서 자동차로 1시간 정도 내달리자 고속도로 변에 커다란 알림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알라디촌 조선족민속촌’이라고 적혀 있었다. 중국 내 경상도 마을이라고 하지만, 중국 내 다른 마을과 큰 차이가 없었다. 양쪽으로 수양버들이 늘어서 있는 길을 5분가량 더 달려가자 한옥 모양으로 세워진 마을 출입문이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에는 ‘어서 오세요’라는 한글 안내문이 붙어 있었고, 출입문을 지나자마자 왼쪽에는 서까래 등을 올린 10채가량의 한옥이 모여 있는 한옥민속촌이 나타났다.

발걸음을 옮긴 곳은 ‘알라디 조선족 소학교’. 학교 운동장 안으로 들어서자 ‘알라디 조선족민속촌 촌민들의 행복을 기원합니다’라는 한글현수막이 나붙어 있었다.

동네 주민들은 이틀 뒤 열릴 ‘제5회 알라디 민속촌 고추문화 관광축제’ 준비에 한창이었다. 대회 준비를 위해 운동장을 새롭게 정비하면서 빼놓지 않는 것이 바로 ‘씨름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매년 경기종목에서 씨름을 빼놓지 않고 있는 것. 한복을 차려입고 장구와 꽹과리, 징 등으로 사물놀이를 벌이는 것도 필수요소 중 하나라고 한다.

“고춧가리가 모자린다. 버뜩 좀 더 챙기온나.” “미주바리 단디 묶어라. 국물 흐르마 우얄라 카노.”

다음 날인 19일 오전 다시 찾은 알라디 김치공장에서는 경상도 사투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고추로 유명한 알라디는 ‘민속촌 고추문화 관광축제’ 때 이곳을 찾는 공산당 간부 등에게 한국 전통의 고추장과 된장, 그리고 김치를 담가 선물하고 있다.

김치를 담그고 있던 방금자씨(여·58)는 “시집을 가기 전에는 친정어머니, 가고 나서는 시어머니가 담그는 김치를 보고 그대로 만들고 있으예”라며 “이곳에 사는 조선족의 집 마당에는 다들 배추를 심고, 어릴 때부터 매년 김장하는 거 보고 자라니까 따로 배우는 것은 없지예. 말투도 늘 듣던 거라서”라며 웃어 보였다.

함께 있던 김순덕씨(여·48)는 “한국에서 오셨니껴. 맛있니더. 먹어 보이소”라며 김치를 길게 찢어 건넸다. “너무 크다. 썰어 달라”고 하자, “김치는 손으로 찢어서 이렇게 먹어야 지맛 아입니꺼. 밥이 있어야 하는데 아십네예”라고 말했다. 부모의 고향조차 기억하지 못하지만, 말투는 경상도 사투리 그대로였다.

◆빼앗긴 국적, 서류에 막힌 귀국

중국으로 건너온 지 1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이들은 아직도 경상도의 말과 문화를 이어나가고 있다. 고향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는 1세대는 거의 다 죽었고, 한국에서 태어나 부모 등에 업혀서야 중국으로 건너왔던 1.5세들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 탓에 현재 살고 있는 이들은 한국보다 중국에서 더 오래 살아 이곳이 편하다고 말하면서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털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이런 마음을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표현했다.

고향에 대한 기억도 없고, 심지어 중국에서 태어난 이들도 한국 땅에 묻힌 할아버지 이야기에 쉽게 말문을 열지 못했다. 어렵게 말문을 열자 눈물샘도 열렸다. 깊게 파인 얼굴 주름을 타고 눈물이 길게 흘러내렸다.

글·사진=중국 길림시에서 노인호기자 sun@yeongnam.com

▨도움말=<사>인문사회연구소 신동호 소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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