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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공부의 神, 천재들의 요람 선산 壯元坊 .10] 영남사림의 기틀을 마련한 김숙자(金叔滋)

2016-08-11

[문과] 세종 1년(1419)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1위
길재의 정통성리학 발전시키며 후학 양성…영남사림 기틀 마련

20160811
김숙자를 배향하고 있는 구미시 해평면 낙성리 낙봉서원. 1787년(정조 11)에 사액되었지만, 서원철폐령에 따라 1871년(고종 8)에 훼철됐다. 그 후 1933년에 강당, 43년에 외삼문을 새로 지었다. 1977년 들어 사당을 짓고 89년에는 동재를, 90년에는 서재를 다시 세웠다. <영남일보 DB>

영남사림의 기반을 구축한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1389~1456) 집안은 장원방의 또다른 명문가로 꼽힌다. 장원방은 15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한 옛 영봉리를 말하며, 지금의 선산읍 이문리·노상리·완전리 일대를 일컫는다. 장원방에서 태어난 김숙자는 1419년(세종 1)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에서 장원을 차지했고, 그의 두 아들 김종석(金宗碩)과 김종직(金宗直)도 장원방에서 학문을 닦으며 문과에 급제했다.

특히 김숙자는 12세때 야은(冶隱) 길재(吉再)에게 배우며 정통성리학의 맥을 이었고, 훗날 조선 역사의 중심에 선 영남사림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능력에 비해 벼슬길은 험난했다. 이혼 문제 때문이었다. 당시 그의 이혼은 자신과 김숙자 집안의 잘못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정 신하들은 옳고 그름을 떠나 김숙자가 주요 관직에 임명되거나 사유록에 천거될 때마다 문제 삼았다. 이 때문에 김숙자는 그의 능력을 제대로 펼칠 수 없었고, 이혼 전력은 평생의 족쇄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남을 탓하지 않고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고 목민관으로 나아가서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

뜻하지 않은 이혼이 벼슬길 족쇄
실추된 명예 회복에 부단한 노력

평생 첩 두지 않고 3년 시묘살이
성리학 철저하게 지키고 가르쳐
훗날 호조판서·이조판서에 추증


#1.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나니

1389년은 고려 창왕(昌王)에서 공양왕(恭讓王)으로 임금이 갈리는 격변의 시대였다. 특히 한 해 전(1388년)에 일어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의 운명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다. 시절이 뒤숭숭한 가운데 선산 영봉리의 진사 김관(金琯)이 아들을 보았다. 숙자(叔滋)라는 이름을 받은 아이는 기대 이상으로 총명해 12세가 되면서는 야은 길재의 문하로 들어가 소학과 경서를 배우기 시작했다. 길재는 당시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후학양성에 힘을 쏟고 있었다. 길재는 소학에 확고한 신념을 가진 성리학자였다. 소학(小學)은 성리학의 완성자로 일컬어지는 주자(朱子)가 편집한 책으로, ‘소(小)’의 의미는 ‘쉽다’가 아니라 ‘성리학의 의식화를 어린 시절부터 해야 한다’는 데 있었다. 그 소학을 길재는 모든 공부의 기본이라고 여겼고, 소학을 통해서 경서의 문리를 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길재 문하에서 소학에 집중하면서 건실한 청년이 되어가던 어느 날, 김숙자는 희소식 하나를 전해들었다. 당시의 이름난 학자 윤상(尹祥)이 황간현감(黃澗縣監)으로 내려와 있다는 내용이었다. 윤상이 역학에 밝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김숙자는 지체없이 충청도로 향했다. 윤상은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고 먼 길을 걸어온 김숙자에게 감동 받았다. 그리고 기꺼이 그를 제자로 받아들여 주역(周易)의 깊은 뜻을 성심성의껏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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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숙자의 과거급제 이력이 간략하게 적혀 있는 국조문과방목.

#2. 관직이 덕(德)에 미치지 못하니

어릴 때부터 배움에 뜻을 둔 김숙자는 21세 되던 해인 1414년(태종 14), 소과에 급제해 생원이 됐다. 이어 31세 되던 해인 1419년(세종 1) 기해년에 대과에 도전했다. 간지(干支) 중에서 자(子)·묘(卯)·오(午)·유(酉)가 들어 있는 해에 실시하는 정기시험이 식년시(式年試)였기 때문에, 기해년은 과거가 없는 해였다. 그럼에도 그해 시험이 치러진 것은 세종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나라에서 기념할 일이 있을 때 임시로 시행하는 시험, 바로 증광시(增廣試)였다.

1419년 3월29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기해1년방(己亥一年榜)이 치러졌다. 시험관인 시관(試官)으로는 예문대제학 유관(柳觀), 참찬 변계량(卞季良), 예조판서 허조(許稠), 직학 성개(成慨), 집의 박관(朴冠)이 나왔고, 전시시관(殿試試官)의 임무는 좌의정 박은(朴)과 예조판서 허조가 맡았다. 그리고 4월4일, 합격자가 발표됐다. 김숙자가 병과(丙科) 장원이었다. 선산 영봉리가 또 한명의 인재를 배출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벼슬길은 순탄치 못했다. ‘의도치 않은 이혼’ 때문이었다. 훗날 아들 김종직이 밝힌 내막은 이러했다.

어느 날 한변(韓變)이라는 자가 김숙자의 할아버지 김은유(金恩宥)를 찾아와, 자신의 과년한 딸을 서둘러 혼인시키지 않으면 중국에 공녀로 잡혀갈 것이라고 하소연했다. 그러자 이를 딱히 여긴 김은유가 김숙자와 한변의 딸을 혼인시켰다. 그런데 김은유가 세상을 뜨고 나서 한변의 신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 명문가 집안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김숙자의 아버지 김관이 크게 노해 아들 김숙자 내외를 이혼시켰다. 한변은 한변대로 사위가 과거급제 후 조강지처와 자식들을 버리고 새장가를 갔다면서 진정에 나섰다. 김숙자로서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 이혼 사건은 번번이 김숙자를 괴롭혔다. 1423년(세종 5)에 임금이 당시 성균직학(成均直學)이었던 김숙자를 사관(史官)으로 임명하려 하자 사헌부에서 강력하게 반대하며 들고 일어섰다. 당시 사헌부에서는 “성균직학 김숙자는 자식이 있는 조강지처를 서얼이라 일컬으며 버렸으니, 형률에 따라 곤장 80대를 치고 아내를 찾아와 가정을 이루게 해야 한다”고 청하고 사관 임명을 거둘 것을 종용했다. 이에 임금도 하는 수 없이 사헌부의 손을 들어줬다. 이 일을 시작으로 김숙자에게 이혼 전력은 인생의 굴레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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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치 않은 이혼 문제는 김숙자에게 큰 족쇄가 됐다. 관직에 임명되거나 사유록에 천거될 때마다 주위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며 반대해 없던 일이 되곤 했다. 1423년, 1438년, 1439년(왼쪽부터) 세종실록에는 당시의 일화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1438년(세종 20), 당시 내자주부(內資主簿)였던 김숙자에게 서연정자(書筵正字)를 겸하게 했을 때도 사간원에서 ‘이혼 전력’을 들어 불가하다고 주장했다. 이듬해인 1439년(세종 21)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집현전에서 경서에 밝고 행실이 올발라 스승이 될 만한 선비를 천거하면서 김숙자를 으뜸으로 올렸지만, 사헌부에서 또 이혼문제를 거론하며 걸고 넘어졌다. 결국 김숙자는 사유록(師儒錄)에서 삭제되고 이 일은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이혼 전력이 자신과 김숙자 집안의 잘못이 아님에도 평생 족쇄가 된 것이다. 억울하고 땅을 칠 노릇이었다.

훗날 아들 김종직은 그의 저서에서 “(아버지 김숙자의) 관직이 덕(德)에 미치지 못했다. 문과에 급제한 뒤 오랫동안 시골에 묻혀 지냈으며, 이후의 벼슬은 모두 당대의 흔한 자리였을 뿐이다. 불우하게도 끝내 큰 업적을 이루지 못하셨으니 타고난 운명이었던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고야 만 것인가”라며 안타까워했다.

김숙자의 이혼 문제는 1454년(단종 2),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에 임명되면서부터 더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제야 일생의 족쇄에서 벗어난 것이다.

#3. 영남사림의 뼈대를 세웠으니

김숙자는 이혼으로 인해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우선 성리학적 가족윤리를 실천하는 데 진심을 다했다. 평생 첩을 두지 않은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김숙자의 아버지, 아우 모두 첩문제로 아내와 불화했을 만큼 축첩은 당시 양반들의 관행이었다. 하지만 김숙자는 달랐다. 또 집안의 혼사에도 늘 경계하고 주의하며 아들딸을 혼인시킬 때면, 반드시 상대방이 세족(世族)인지 가훈(家訓) 있는 집안인지를 확인했고, 혼사가 결정된 다음에는 누구도 이간질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평생의 가치로 삼은 소학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도 철저했다. 1431년(세종 13)에 연달아 부모상을 당했는데, 특히 모친상 때는 ‘소학’이 이른 대로 물 한 잔조차 마시지 않았고 초빈(草殯·사정상 장사를 속히 치르지 못하고 시신을 방 안에 둘 수 없을 때에, 한데나 의지간에 관을 놓고 이엉 따위로 그 위를 이어 눈비를 가릴 수 있도록 덮어 두는 일)을 마치고서야 겨우 죽을 들었다. 당시에는 선비집안에서도 불가의 장례법을 따랐지만, 그는 모든 의식을 주자의 예에 따라 거행했다. 그리고 장사 후에는 3년 동안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면서, 상복도 벗지 않고 단 한 번도 집에 들르지 않는 등 스스로를 가파른 데까지 몰아붙였다.

제자들에 대한 교육도 다르지 않았다. 시묘살이와 선산교수 시절 동안 수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었는데, 그들에게 특히 공부의 순서와 과정을 엄격하게 가르쳤다.

그는 늘 “공부에는 순서가 있다. 그 과정을 중시하는 것은 각 과정에 따르는 실천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니 처음은 ‘동몽수지(童蒙須知)’의 ‘유학자설정속편(幼學子說正俗篇)’을 암송하고, 다음으로 ‘소학’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고 나서야 ‘효경’ ‘사서오경’ ‘자치통감’ ‘제자백가’인 것이다”라며 공부의 과정을 중시했다. 아울러 무슨 책이든 한 글자씩 모두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면서 정독할 것을 강조했다.

이러한 김숙자에게서 배출된 제자들이 걸출하게 성장해 훗날 영남사림을 완성했다. 조선 역사의 중심에 선 영남사림의 기틀을 반듯하게 놓은 이가 바로 김숙자였다. 선조조의 유명한 학자 기대승(奇大升)이 “정몽주는 성리학의 원조대가로, 그 정몽주에게서 길재가, 길재에게서 김숙자가, 김숙자에게서 김종직이, 김종직에게서 김굉필이, 김굉필에게서 조광조가 배웠으니”라고 정리했을 정도로 김숙자의 영향력은 실로 지대했던 것이다.

#4. 세상으로부터 존경받아 마땅하니

김숙자는 이상적인 목민관이기도 했다. 낮은 벼슬이라고 해서 탓하는 법도 없었다. 고령과 개령의 현감으로 있을 때, “토지가 있고 백성이 있으니, 여기서도 나의 학문을 실천에 옮길 수 있다”면서 백성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능력과 지식을 아끼지 않았다. 해마다 종자 없는 농가에는 종자를, 식량 없는 농가에는 환곡(還穀)을 빌려주었고, 흉년에는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휼했으며, 가난한 주민의 혼사에는 혼수까지 마련해주었다. 또한 향교를 정비해 선비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했다. 아울러 학업을 직접 지도하기도 해서,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고령·개령 출신 선비들이 그 공을 하나같이 김숙자에게 돌린 적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약속(約束)’이라는 규정을 만들어 아전들을 지혜롭게 통제해 그 청렴결백함과 공정함을 칭송받기도 했다. 감격한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워 기렸음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세조가 즉위하자 홀연 밀양의 처가로 내려갔다. 세상에 더는 미련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곳에서도 김숙자는 특별했다. 두어 달 만에 식량이 떨어질 정도로 청렴했을뿐더러, 중요한 외출에는 말이 아닌 죽여(竹輿·대를 엮어 만든 가마)로 이동했다. 그런 김숙자를 일러 사람들은 세상이 존경할 만한 어른이라는 뜻에서 ‘달존(達尊)’이라 불렀다. 그렇게 김숙자는 진정한 어른으로 남으며 1456년 세상을 등졌다. 1489년(성종 20)과 1845년(헌종 11)에 걸쳐 호조판서·이조판서 등으로 추증됐다. 지금 구미시 해평면 낙성리 낙봉서원(洛峰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하지만 그 누구라고 아들 김종직의 마음을 넘을 수 있으랴. 영남사림의 영수로 명망이 높았던 아들 김종직은 존경했던 아버지를 잊지 못하고 김숙자의 일평생을 기록한 ‘이존록(彛尊錄)’을 남겼다. 이존록에 나오는 내용 중, 김숙자가 김종직에게 건넨 말이 귀에 심히 무겁다.

“사람들이 나를 졸(拙)하다(못났다)고 하는데, 졸한 것이야말로 진정 큰 보배라. 나는 진실로 그 말을 다행으로 여긴다. 너도 내 아들인지라 나중에 졸하기로 이름이 날 것이다. 하니 그런 세평에 부디 괘념치 말라.”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도움말=박은호 전 구미문화원장
▨참고문헌=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선산의 맥락, 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조선왕조실록
공동기획:구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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