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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인재의 고장 청송 .10] 효를 다한 풍호 신지와 日에 항거한 후손

2018-08-01

80세까지 부모 사당에 절 올려…효행·청렴으로 의영고부사 제수돼

[인재의 고장 청송 .10] 효를 다한 풍호 신지와 日에 항거한 후손
풍호 신지가 지은 풍호정. 신지는 ‘반드시 남쪽 고향땅으로 가라’고 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청송 진보면 합강에 내려와 풍호정을 짓고 살았다.
[인재의 고장 청송 .10] 효를 다한 풍호 신지와 日에 항거한 후손
청송군 파천면 중평리에 있는 평산신씨 판사공파 종택. 신지의 후손들은 조선 전기 이후 합강에서 살다가 임란 후 신예남의 현손인 신한태가 파천면 중평리로 이거해 종택을 짓고 집성촌을 이루었다.
[인재의 고장 청송 .10] 효를 다한 풍호 신지와 日에 항거한 후손
풍호정 오른쪽에 있는 신지의 후손 신예남과 부인 여흥민씨를 기리는 쌍절비각(雙節碑閣).

영양 일월산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굽이쳐 흐르던 반변천(半邊川)은 청송 진보에 들어 서쪽으로 향하며 합강리를 적신다. 합강(合江)은 여러 갈래의 물이 한데 모여 큰 강을 이루었다는 곳이다. 1984년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마을은 수몰되고 형세도 변하였지만, 합강의 자연은 지금도 가슴이 죄어올 만큼 기려하다. 그 커다란 아름다움 속에 송두리째 자신을 맡기고 앉은 정자 하나가 있다. 풍호(風乎) 신지(申祉)의 정자 풍호정(風乎亭)이다.

#1. 아버지 유언 따라 청송에 입향한 풍호 신지

신지는 고려 개국공신이자 평산신씨(平山申氏) 시조인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의 후손이다. 그는 1424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자는 독경(篤慶), 호는 풍호(風乎)다. 신지는 어릴 때부터 풍채가 늠름하고 재기가 비범했으며 효성이 지극해 인근의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는 세조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지만 벼슬에 나가지 않았고, 1463년에는 효행과 청렴으로 의영고부사(義盈庫副使)에 제수되었지만 역시 나가지 않았다.

신지의 아버지는 연남재(戀南齋) 신영석(申永錫)으로 교도관(敎導官)을 지냈다. 어머니는 감무(監務)를 지낸 원주이씨(原州李氏) 이조(李稠)의 딸이었다. 신영석과 원주이씨의 장남이 신지, 차남이 상사공(上舍公) 신희(申禧)다. 신영석은 아들들에게 ‘반드시 남쪽 고향땅으로 가라’고 유언했는데, 신지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진보 합강으로 내려와 입향시조(入鄕始祖)가 됐다. 그는 합강 상류의 절벽을 다듬어 풍호정을 짓고 동생 신희(申禧)와 더불어 즐기며 살았다고 한다.

‘풍호’는 ‘바람을 쏘이며 여유롭게 노닌다’는 의미다. 언젠가 공자가 제자들에게 소원을 묻자 증점(曾點)이 ‘기수(沂水)에서 목욕을 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고 나서 노래를 부르며 돌아오고 싶습니다’라 대답했다. 그러자 공자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내가 점의 뜻과 같다’라 했다. 신지는 ‘풍호정서(風乎亭序)’에 ‘기수는 멀고 무우는 보이지 않았는데, 이곳에 와 보니 기수와 무우의 즐거움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했다. 또한 ‘풍호의 뜻을 완상하는 사람은 크게 스스로 얻는 즐거움이 있을 것’이라 하였는데, 이는 욕심과 충만에 대한 이야기인 듯하다.

풍호정은 천변의 바위벼랑 위에 안정감 있게 자리하고 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5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왼쪽에는 ‘ㅁ’자형 주거건물인 주사(廚舍)가 있다. 주변에는 웅장한 소나무 고목들이 둘러섰다. 오른쪽의 먼 시선은 비봉산(飛鳳山)에 닿는다. 정면으로는 광덕산(廣德山)이 빛난다. 왼쪽에는 작약 꽃봉오리 같은 작약산(芍藥山)이 은근히 한 줄기를 뻗어 천 너머 눈앞에 드리우고 있다. 모두가 말간 얼굴들이다. 신지는 ‘밖으로는 때를 씻어내어 그 몸을 깨끗이 하고 안으로는 모든 찌꺼기를 씻어 버려 마음을 깨끗이 하고자 한다’고 했다. 풍호정 곁에는 유난히 긴 가지를 늘어뜨리고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나무는 150년 전 어느 겨울날 폭설에 윗가지가 꺾였으나 꿋꿋하고 맑게 살아남았다. 뿌리 깊은 나무다.

#2. 평산신씨 판사공파의 역사와 신지

평산신씨 판사공파의 중시조는 신숭겸의 13세손인 불훤재(不齋) 신현(申賢)이다. 신현은 역동(易東) 우탁(禹倬)의 문인으로 당대의 대학자로 추앙되던 인물이었다. 그는 명나라에 자주 초빙되어 명태조로부터 스승의 대우를 받았으며 공민왕조에는 영해군(寧海君)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신용희(申用羲) 역시 학문이 뛰어났으며 정당문학(政堂文學)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냈다.

신용희의 아들은 판서공(判書公) 신득청(申得淸)으로 판사공파의 파조다. 신득청은 충숙왕 때 형 신백청(申伯淸)과 쌍둥이로 태어나 문과도 같은 해 급제했다. 신득청은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태복판사(太僕判事)를 지냈고 형 신백청은 대제학 전리판서에까지 올랐다. 고려 말의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신백청이 주살(誅殺)되자 신득청은 벼슬을 버리고 영해로 낙향했으며 고려가 망하자 동해에 투신해 자결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가문의 수난이 시작된다.

신득청에게는 신예(申藝), 신자악(申自嶽), 신자성(申自誠) 세 아들이 있었다.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신예는 고려 말 두문동에 들어갔다가 후에 진보에 살았다. 그때 태어난 아들이 신지의 아버지 신영석과 신중석으로 쌍둥이 형제였다. 신예는 아버지 사망 5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신득청의 셋째 아들인 신자성은 포은 정몽주에게 수학한 인물로 조부의 순절을 보고 과거에 응시하지 않다가 황희, 맹사성 등의 권유로 정계에 나가게 된다. 태종 1년인 1401년, 조정에서는 이방원이 살해한 정몽주 등에 대한 벼슬을 증직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이때 신자성은 ‘이씨에게는 자격이 없다’는 상소를 올리고는 벼슬을 버리고 영해로 귀향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온 그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후 사건은 다시 파헤쳐져 1401년 신자성은 부관참시를 당하고 영해의 종택은 금부도사가 무너뜨린 뒤 그 자리에 연못을 만들어 버렸다. 이 참화로 또다시 멸문의 위험에 처한 불훤재의 후손들은 각자 살길을 찾아 세상을 등지게 된다.

이때 원주 치악산에 은거하던 선비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이 신예의 어린 아들들을 거둔다. 원천석은 신현과 신용희 부자의 제자로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이다. 그는 고려 말 정치의 문란에 개탄하면서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원천석은 스승의 후손들이 화를 당하지 않게 피신시키고 가문을 잇도록 보살폈다. 그는 아이들에게 ‘평산이라 하지 말고 영해라 하여라. 그리고 세월이 오면 평산으로 복본하여라’고 가르쳤다. 이때부터 평산신씨 판사공파는 581년 동안 영해신씨로 살았다고 한다. 신영석은 원주에서 성장해 살았으며 신지가 원주에서 태어난 것은 그러한 연유에서다. 신영석은 늘 영남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의 호 ‘연남(戀南)’은 ‘남쪽을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신영석의 묘는 원래 원주에 있었으나 도시계획에 의해 2007년 청송으로 이장되어 마침내 ‘남쪽’으로 오게 되었다.

#3. 80세까지 효를 다한 신지, 그리고 후손들

신지는 80세까지 매일 아침저녁으로 부모님 사당(祠堂)에 절을 올렸다고 한다. 언제나 친히 술잔을 올리는 정성을 다하였고, 제전(祭田)을 많이 마련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 신지는 세상을 떠난 후 진보에 묻혔다. 그는 자손들에게 유계(遺戒)를 남겼는데, 그중에는 과거를 위한 학문을 하지 말고 수양을 위한 학문을 할 것, 남에게 교활한 짓을 하지 말 것, 자기 허물은 덮어두고 남의 단점만 책하지 말 것 등 매우 실천적인 항목이 있다. 부인은 현감(縣監) 오강(吳江)의 딸로 어질고 너그러우며 정숙한 여인이었다고 한다. 슬하에 아들 신창명(申命昌)을 두었는데, 후에 군수(郡守)가 되었다.

풍호정 오른쪽에는 신지의 후손 신예남(申禮南)과 부인 여흥민씨(驪興閔氏)를 기리는 쌍절비각(雙節碑閣)이 있다. 신예남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갔으나 온갖 협박과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다가 결국 자결한 인물로 일본인들이 그를 진의사(眞義士)라 칭송했다고 전한다. 부인 민씨는 남편이 왜적의 포로가 되자 왜적에게 뛰어들어 항거하다 순절했다고 한다. 선조(宣祖) 때 신예남은 공조참의(工曹參義)에, 부인 여흥민씨는 정부인에 증직되었다.

신지의 후손들은 조선 전기 이후 합강에서 살다가 임란 후 신예남의 현손인 신한태(申漢泰)가 파천면 중평리로 이거해 종택을 짓고 집성촌을 이루었다. 현재 평산신씨 판사공파 종택은 경북도 민속자료 제8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마을에는 서벽고택(棲碧古宅), 사남고택(泗南古宅) 등 신씨 후손들의 오래된 집들이 반듯하게 남아 있다. 마을 안 산기슭에는 사양서원(泗陽書院)이 자리한다. 사당은 화해사(華海祠)로 신현, 신용희, 원천석을 배향하고 있으며 지금도 향사를 올리고 있다.

글=류혜숙 <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자문=김익환 청송문화원 사무국장

▨ 참고문헌=청송군지. 청송누정록. 청송군 홈페이지 자료,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한국국학진흥원 자료, 한국의 서원 통합보존관리단 자료, 평산신씨 판사공파 사이버종회 자료, 원주원씨운곡대종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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