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시대 도시개발 위해
저수지 메워 만든 자갈마당
여기에 아파트 짓는다는 건
110년전의 이유와 같아보여
몇십년 뒤엔 다시 후회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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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구 시간과 공간 연구소 이사 |
2007년 11월12일 난 뜬금없는 메일을 받았다. 알고 지내던 선배의 메일인데 한 일본인을 안내해서 그의 집을 찾아줘야 한다며 도와달라는 부탁이었다. 그 일본인은 오카다 다카유키라는 사람이고, 일제강점기 유곽 자갈마당에서 태어났다. 오카다 다카유키의 호적등본을 보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태어난 곳이 자갈마당, 즉 대구 중구 수창동에 있는 팔중원정(八重垣町)이었다. 더 인상적인 메일에서의 표현은 ‘노인의 처음이자 마지막 고향 방문’이라는 것이다. 아니 일본인의 고향이 대구라고? 그것도 자갈마당이? 왜 일본인의 고향이 대구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카다씨의 고향이 대구’라는 표현은 태어나서 처음 듣는 것이었다. 쇼와(昭和)시대 조선에서 출생한 일본인들이 겪고 있는 딜레마가 바로 이 문제였다. 고향은 조선인데, 국적이 일본이라는 것. 빼앗은 영토(조선)는 고향이 될 수 없으니 패전하면서 고향을 상실했고, 죽기 전에 고향을 방문해보고 싶은 식민지시대 조선에서 출생한 시민이었던 것이다.
그의 ‘출생지 찾기’에 동참하는 마음이 복잡했던 이유는, 오카다씨가 태어난 그 이전 시대의 자갈마당과 관련이 있다. 그는 1935년 조부모가 운영했던 유곽 대강매(大江梅)에서 태어났다. 오카다씨가 방문하려고 했던 2007년에도 그곳은 성매매 집결지였다. 아니, 어떻게 100년 동안 세상이 여러 번 변했는데 여성의 성을 착취하는 일이 멈추지 않았는지….
그 유곽은 왜 생긴 걸까? 시작은 대구읍성의 철거와 연결돼 있다. 현재의 자갈마당은 조선시대 대불지(大佛池)라는 못이었다. 지면보다 수면이 낮았고 그 땅을 매립한 흙과 돌은 서성로와 북성로 성곽이다. 조선이 파괴되면서 일본인들의 도시조직이 탄생한 것이 절묘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매립하면 그 권한이 매립자에게 있는 근대적 개발논리의 시작이 바로 식민지시대의 초기 풍경이었던 것이다. 1906년 11월19일 일본인 거류민회의 도로위원회 개최 안건에서 이 지역을 유곽지로 지정하는 의견이 처음으로 나오게 된다. 쉽게 말해 도시계획 혹은 식민지 개척자의 부동산 개발로 이 지역이 새롭게 탄생했고,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중에 ‘아 그래 유곽으로 하자’라는 결의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요지는 팔중원정, 즉 현재의 도원동 자갈마당은 성의 착취를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수지를 매립하고 보니 뭐 필요한 게 없을까라고 생각하다 ‘유곽’이 떠올려졌다는 것이다. 쓸모없는 땅이 쓸모 있는 땅이 되니 그 무엇이 ‘유곽’이 되었다는 것이다. 난 이런 얄팍한 시각이 문제가 있다고 본다.
2016년 대구여성인권센터가 자갈마당에 전시회를 개최할 때 본인은 하나의 예언을 했다. 물론 그 예언이 이뤄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 예언은 ‘자갈마당은 성매매집결지 폐쇄라는 캠페인으로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도시개발로 사라질 것’이라는 것이다. 자갈마당이 출생한 이유가 다시 100년 뒤에 사라질 이유가 될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2018년 8월17일 대구도시개발공사는 자갈마당 개발을 위한 타당성조사 용역입찰을 냈다. 1906년 일본인 거류민회가 이곳을 매립했던 그 고압적 태도는, 2018년 도시개발공사가 이 지역을 포맷하고 아파트를 세우겠다는 그 논리와 적어도 나에겐 동일해 보인다. 근대도시의 프레임에서 도시를 개발하겠다던 일본인들의 논리가 자갈마당을 만들었다. 110년이 지나서 다시 도시개발공사가 도시를 개발하겠다는 논리는 110년 전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난 과거가 유통되면서 ‘새로운 것’처럼 대체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자갈마당이 아파트로 새롭게 만들어진다고 하는 것은 110년 전 유곽이 만들어졌던 이유와 동일해 보인다. 이곳에 만들어진 유곽처럼 몇 십 년 지나지 않아 다시 후회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권상구 시간과 공간 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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