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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이사람] 곽동협 곽병원 원장

2018-10-12

“소외이웃에 아낌없는 의료봉사…2代째 병원운영 원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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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원 무료진료 봉사활동.

곽동협 곽병원 원장(61). 의사로서, 종합병원을 운영하는 경영인으로서 바쁜 그는 마라토너, 밴드마스터 등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이만이 아니다. 그동안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대표, 일제강제동원피해자 지원재단 이사 등으로 일한 그는 다양한 사회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어느 누구보다 짧은 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는 그는 “세상에 못할 것은 없다. 하면 된다”는 말로 그의 삶의 자세를 보여줬다. 인터뷰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질문지를 미리 보내달라고 한 곽 병원장은 아주 성실한 답변을 보내줬다. 사진을 찍으면서 추가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도 그는 몇 차례나 ‘하면 된다’를 되뇌었다. 삶을 대하는 성실성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느끼게 하는 인터뷰였다.

대구서 60년 이상된 민간자본 유일 종합병원
위안부 할머니·새터민·다문화가정 의료지원
선친, 장학·새마을·문화·노인복지사업 앞장
아버지가 롤모델…환자 말에 경청·공감·배려
새해 환자 발 씻어주는 세족식…섬김정신 의식
마라토너·밴드마스터·일제강제동원재단 활동
직원과 소통 중시, 록밴드 공연때 폭발적 호응
수필 쓰며 작은 것 등 세상 바라보는 시선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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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동협 곽병원 원장이 원장실에서 애지중지하는 기타를 들고 포즈를 취했다.

▶곽병원은 대구의 대표적인 사립종합병원입니다. 대구지역 종합병원 가운데 동산의료원, 경북대병원 다음으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시내 중심가에 위치해 있는 곽병원은 1952년 선친(고(故) 곽예순 박사)이 곽외과의원으로 개원했습니다. 1983년 종합병원으로 성장 발전하면서 현재 24명의 전문의를 비롯해 30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지역을 대표하는 2차 종합병원으로 성장했습니다. 대구에서 순수 민간 자본으로 설립, 종합병원으로 승격하면서 60년 이상의 연륜을 자랑하고 있는 곳은 아마 곽병원이 유일할 것입니다.”

▶2대에 걸쳐 병원을 운영하고 계십니다.

“친구들이 우스갯소리로 저를 세습원장이라고 하면서 세습원장 되기가 선출직 원장 되기보다 어렵다고 하더군요. 저는 1992년 내과과장으로 곽병원에 들어와 99년 병원장으로 취임했습니다. 대구에 많은 병원이 있지만 2대에 걸쳐 병원을 하는 곳이 잘 없기 때문이겠지요. 그만큼 병원 운영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곽병원이 이렇게 오랫동안 지역민의 사랑을 받은 것은 곽병원만의 장점이나 특징이 있기 때문일 듯합니다.

“곽병원을 지탱해온 원동력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봉사정신’이라 할 것입니다. 현행 건강보험제도가 정착되기 이전에는 저소득 지역민들에게 무료진료 등을 통한 의료봉사를 실천하였으며 지금도 위안부 피해 할머니, 새터민, 다문화가정, 범죄피해자 등에게 의료 전반에 걸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어릴때부터 의사를 꿈꿨는지요. 의사가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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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을 하고 있는 곽원장.

“어릴때는 딱히 의사가 될 생각이 없었습니다. 잠시 공대로 진학을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부모의 권유로 의사가 되었습니다. 선친은 의사로 일하면서 지역 발전을 위한 새마을사업, 장학사업, 충효사업, 문화사업, 노인복지사업뿐만 아니라 시민의식 개혁운동에도 앞장섰습니다. 1984년에는 ‘남의 말 좋게 하자’는 운동을 제창하여 JC와 함께 추진했지요. 지역 최초로 시작한 ‘잔반 남기지 않기 운동’은 사회운동으로 승화되기도 했습니다. 선친께서는 자기 관리가 철저하여 매일 오전 6시에 일어나서 영어 단어를 20개씩 암기했고 걸어서 출퇴근하셨습니다. 이런 것이 저의 롤모델이 된 듯합니다.”

▶의사로서 꽤 오랫동안 활동을 해왔습니다. 어떤 의사가 꿈이었고 이 꿈을 어느 정도 달성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환자에게 필요한 의사가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되려면 의학적으로는 책을 자주 봐야 되고 환자의 말에 경청, 공감, 배려를 하여야 됩니다. 환자와의 갈등이 있을 경우 젊을 때는 힘들어했지만 스스로 ‘을’이라 생각하고부터 환자와의 마찰도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도 대부분 사라졌지요. 그리고 의사로서의 마음가짐을 다지는 곽병원의 행사로 세족식이 있는데 여기에 큰 의미를 둡니다. 병원장을 비롯한 전문의와 간호사들이 환자들의 발을 씻어주며 새해를 시작하는데 이 행사를 2009년부터 10년째 매년 새해 첫날에 열고 있습니다. 봉사와 섬김의 정신으로 진료에 임하는 곽병원만의 의식인 셈이지요.”

▶의사로서의 어려움도 있고 행복한 점도 있을 것입니다.

“의사로서의 어려움은 별로 없고(학생 때는 공부가 하기 싫어서 의사가 되기까지의 어려움은 아주 많았고 요즘도 가끔 시험치는 악몽에 시달리곤 한다) 나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부터는 하루하루가 행복합니다. 그래서 출근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행복의 조건은 경제적으로 연수입 5천만원이 넘으면 되고 스스로 하는 일이나 생활에 의미와 재미를 부여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외부 조건을 바꿀 수 없을 때는 나 자신의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그러한 사고의 전환은 마라톤을 통해 배웠습니다. 힘들고 지루한 마라톤을 하며 터득한 것이지요. 마라톤을 하면서 체중이 줄고 건강해지는 모습에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또 달리며 상념에 잠기는 것이 재미있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습니다. 학생때 이런 것을 알았더라면 공부를 아주 잘하지 않았을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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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곽원장.

▶병원장으로도 오랜 세월 활동했습니다. 병원장으로서의 보람과 어려움은 무엇인지요.

“직원과 합심하여 어려움을 극복했을 때, 환자와 보호자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말을 들었을 때 의사로서, 병원장으로서 보람을 느낍니다. 어려움은 공급 과잉의 무한경쟁 시대에 누구나 다 겪는 일입니다. 사실 중소병원의 원장은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아직도 일요일과 공휴일에도 출근합니다. 살다보면 인간관계의 갈등 또한 많은데 이것 또한 누구나 다 겪는 일입니다. 이를 극복해가는 과정이 바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원들과의 소통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식의 소통을 하고 있는지요.

“매주 화요일 전 직원 조회모임을 가지는데 대표적인 소통의 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의사 결정을 할 때 현장의 소리를 직접 들으려 노력합니다. 예를 들어 평직원들이 사용할 물건을 결정할 때 현장의 소리를 직접 들으면 간부 직원의 의견을 듣는 것보다 효율적이지요. 물론 내 의견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시킵니다. 명절 선물 같은 것은 집에 가져가지 않고 직원들에게 나눠줍니다. 곽병원 원장에게 온 선물이지 곽동협에게 온 것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일반 직장처럼 직원과의 소통과 화합을 위하여 회식, 야유회, 체육대회 등도 합니다. 올해 봄 개원 66주년 기념행사로 직원들 앞에서 제가 소속되어 있는 록밴드 공연을 하였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습니다. 평소 병원에서 직원들에게 박수받을 일이 별로 없었는데 박수, 함성, 오빠~란 소리까지 듣고…. 분위기가 대단했습니다. 평소와 달리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기타를 치며 망가지는(?) 원장의 모습에 직원들이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유튜브에 ‘곽병원’으로 검색이 가능하다)”

▶일본군 강제위안부 관련 활동도 많이 해오신 것으로 압니다.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위안부피해 할머니의 평생 무료진료를 맡으며 할머니들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1997년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 결성되어 10년 가까이 대표를 맡았지요. 지금도 할머니들의 의료와 복지 등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총 20명의 할머니를 진료하였습니다.”

▶밴드를 이끌고 있습니다.

“어릴때부터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누나 기타를 빼앗아 독학으로 기타를 치기 시작했지요. 대학생 때 경북의대 메디칼사운드 기타리스트로 작곡도 하여 1978년 MBC 대학가요제에 출전하기도 했습니다. 대학졸업 후 바쁜 생활에 음악을 놓고 지냈다가 2012년 의대 메디칼사운드 올드멤버들이 모여 ‘목요인생’이라는 이름으로 밴드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매주 목요일 저녁에 만나서 1시간 연주합니다. 그리고는 술 마시며 인생이야기를 하지요. 이것이 바로 목요인생의 재미입니다. 그런데 멤버들이 공연을 안하려 합니다. 스트레스 풀려고 밴드 하는데 공연하려면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라 합니다. 밴드 연주에서는 하모니가 가장 중요합니다. 누구 하나 잘 한다고 좋은 연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연주자들의 소리가 맞지 않으면 음악이 아니라 소음이 되지요. 신곡을 합주하는 첫날 완성할 때 그 성취감은 느껴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자작곡이 10여 곡인데 이를 연주하면서 완벽한 하모니를 이룰 때는 아직도 전율을 느낍니다.”

▶한때 마라톤도 상당히 열심히 한 것으로 압니다.

“마라톤은 2004년에 비만 관리를 위해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몸무게가 상당히 많이 나갔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동호회에 가입해 마라톤을 하는데 저는 인터넷, 책 등을 통해 마라톤에 대해 독학을 한 뒤 혼자 뛰고 있습니다. 8개월 동안 18㎏을 감량해 사람들이 제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였습니다. 마라톤을 하면서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전국에서 열리는 마라톤대회에 많이 참여했지요.(원장실에는 70여개의 마라톤 수상메달이 있었다. 하지만 몇년전 몸에 이상이 생겨 마라톤은 하지 않고 있으며 주 5회 정도 조깅으로 체중관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수필도 쓰신다고 들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글솜씨가 형편없습니다. 수필은 병원장이 된 후 병원 소식지에 병원장 글을 올려야 되어서 할 수 없이 쓰게 되었습니다. 글을 쓰면서 ‘하면 된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처음에는 글 때문에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격월간인 소식지에 글을 쓰는 것에 대한 부담이 예전같지 않습니다. 글을 쓰면서 세상을 달리 보게 되었습니다. 글의 소재를 찾아야 되다 보니 일상의 작은 것들까지 세심히 살피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지요. 글 솜씨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이 더 큰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의 병원 운영계획에 대해서도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작은 외과의원으로 출발해온 곽병원이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을 돌보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희망이 되고자 노력하였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앞으로도 지역민들에 대한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생명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글=김수영기자 sykim@yeongnam.com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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