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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출신 ‘韓末 최초 의병장’ 문석봉…집터엔 그 흔한 표지판 하나도 없어

2019-06-01

■ 오늘 ‘의병의 날’
고택 복원이라도 바라는 후손들
“개인·지자체만으론 재정 역부족
보훈처가 나서 힘 보태줬으면…”

달성출신 ‘韓末 최초 의병장’ 문석봉…집터엔 그 흔한 표지판 하나도 없어
대구시 달성군 현풍읍 성하리에 있는 한말 최초 의병장 문석봉 의사의 집터.
달성출신 ‘韓末 최초 의병장’ 문석봉…집터엔 그 흔한 표지판 하나도 없어
문석봉 의사 존영

1일은 제9회 의병의 날. 대구시 달성군은 임란의병과 한말의병의 발상지다. 임진왜란 최초 의병장으로 알려진 망우당 곽재우는 말년에 고향인 현풍으로 돌아와 은거하다 별세했다. 그의 산소는 달성군 구지면에 있다. ‘의병의 날’도 곽재우가 첫 의병을 일으킨 음력 4월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정했다.

구한말 최초 의병장인 의산(義山) 문석봉 의사(1851~1896·건국훈장 독립장) 역시 달성군 현풍 출신이다. 하지만 그가 살던 고택(대구시 달성군 현풍읍 성하길 68-7)엔 흔한 간판이나 표지판 하나 없다. 이 고택은 1911년까지 문 의사의 아들 문정경 소유로 돼 있다가 지금은 농가주택으로 새로 지어 사용되고 있다.

달성군 현풍읍 상리(현 현풍초등 부근)에서 태어난 문 의사는 25세 때 중국 난징으로 가서 3년간 한의학을 배우고 귀국했다. 30대 초반에 전라도지역의 세곡을 서울로 운반하는 조운선의 관리가 된 그는 곡식을 풀어 굶어죽는 백성들에게 나눠주다 체포령이 떨어져 방장산으로 도피했다. 문 의사는 40세 즈음 고향 현풍으로 왔다. 그가 쓴 의산유고에 따르면 ‘41세 되던 해 고향의 수문동(현 성하리)에서 친척인 문용현과 함께 영파재(映波齋)를 지어 빈민자제 50여 명에게 한학을 교육했다’고 나온다.

1893년 별시 무과에 급제한 그는 경복궁 오위장에 특채됐다가 진잠(현 대전시 유성구 진잠동) 현감에 제수됐다. 그는 1895년 8월20일(음력)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된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천고에 없는 강상의 대변”이라고 통분해하며 ‘국수보복(나라의 원수에 보복)’의 기치를 내걸고 그해 9월18일 충남 공주 유성에서 유학자와 평민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다. 공식기록으로 한말 최초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는 그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처음으로 일으킨 의병이며 향후 의병 활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기폭제 역할을 해 의병사에 큰 의미를 갖는다’고 나와있다.

그는 유성장터에서 부대를 편성한 뒤 300여 명과 함께 공주부 관아 무기고를 습격하다 매복해 있던 관군에게 패해 체포됐다. 대구부 감옥으로 압송된 그는 경상도관찰사 이중하에게 공초를 받았다.

문 의사는 감옥에서 탈출해 제천의 유인석 의병장과 함께 재봉기를 시도하던 중 병에 걸려 현풍으로 귀향해 요양하다 46세에 숨을 거뒀다. 묘소는 달성 구지면 창리에 있다가 대전국립묘지로 옮겼다.

대전 유성구청은 2004년 유성시장에 ‘을미의병의 효시, 유성의병’이라는 기념비를 세웠고 달성군은 2015년 뒤늦게야 달성스포츠파크 광장에 문 의사의 흉상을 만들었다.

문석봉의 증손인 문희찬 전 대구시 도시디자인과장은 “광복 50주년 되던 1995년 증조부의 영정과 교지 등을 도둑맞아 안타깝고 죄송스럽다. 증조할아버지의 사당 또는 재실을 건립하거나 고택을 복원해 달성의 관광자원으로 만들고 싶지만 엄두가 나질 않는다. 개인이나 지방자치단체 단독으로 하기엔 재정 부담이 크다. 정부, 특히 보훈처가 나서 힘을 보탰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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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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