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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성로∼향촌동 골목 그 100여년의 이야기

2019-06-28

‘북향로드’를 걷다(상)
낮엔 철공소 공구 두드리는 소리… 밤엔 술집 젓가락 두드리는 소리…

북성로∼향촌동 골목 그 100여년의 이야기
대구 첫 엘리베이터, 대구 첫 가로등길이 등장했던 북성로. 1990년대 이후 절반 정도의 각종 가게가 유통단지로 이전했지만 아직도 1천여개 점포가 주위에 산재해 있다.  
북성로∼향촌동 골목 그 100여년의 이야기
대구읍성이 철거될 당시 맨먼저 허물어진 북쪽 구역이 북성로로 태어난다. 숱한 도심개발이 있었지만 아직 원형을 갖고 있다. 조만간 도심뉴딜개발사업으로 인해 상당 구역이 뜯겨나갈 것 같다. 북성로와 향촌동 수제화골목을 이어주는 신신전당포 골목 삼거리.

북성로와 향촌동 사이. 너무나 많은 사연을 담고 있는 그 길을 ‘북향(北鄕)로드’라 부르고 싶다. 북성로·향촌동 이야기가 저기압과 고기압처럼 붙어다닌다. 하나는 딱딱하고 하나는 몰랑하다. 하나는 물건을 공급하고 다른 하나는 그 물건 판 돈을 소비하게 만든다. 쇠와 꽃의 절묘한 조합 같다. 그 구간을 동서남북으로 연결하면? 그게 바로 지난 100년의 대구발전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갈가리 찢겨지기 직전 대구읍성부터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총연장 2천124보(2.68㎞)의 이 성은 지금의 수성못(2㎞) 둘레보다 조금 더 길다. 1736년 지어졌지만 270여년 만에 참수된다.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도로가 돋아났다. 사람들은 ‘신작로(新作路)’라 했다. 현 중부경찰서 앞 네거리. 대구 신작로 출발선이었다.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됐을 때 일본 사업가들은 대구역 지척에 있던 이 언저리부터 찜했다. 그들에겐 ‘대구의 엘도라도’로 보였을 것이다.

온갖 상업시설을 앞다퉈 깔았다. 1904년 16세에 북향로드로 와서 훗날 ‘일본인 이병철’로 성공한 사업가가 있었다. 사카모토 도시스케. 그는 GM과 시보네 특약판매권 덕분에 수백대 차량을 갖고 <주>남조선자동차 대구출장소를 차렸으며 덕분에 최강의 운수사업가가 된다. 자체 자동차 수리공장을 거느리고 거기서 토목, 철가공, 칠, 판금공 각 부문 기술자를 묶어 연 3천500대의 차량을 수리했다. 이 거리에 돈이 모이니 유흥·휴게·유통업자로 들끓는다. 영화관, 다방은 물론 대구관, 도수원, 달성관 등 20여개의 요정도 가세한다. 대구 최초의 가로등거리, 엘리베이터가 장착된 백화점(미나카이)도 생긴다. 대구 최초의 호텔격인 영양·화월호텔, 대구 최초 목욕탕인 조일탕…. 기계, 금속, 철물, 농기구, 목재, 건축, 페인트 가게가 우후죽순 들어선다.

북성로∼향촌동 골목 그 100여년의 이야기
2012년 생겨난 <사>시간과 공간 연구소의 지원사격을 받아 2013년 개관한 북성로공구박물관이 ‘기술예술융합소’란 이름으로 확장이전된 중구 대안동 모루. 북성로와 동고동락한 온갖 공구의 연대기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북성로∼향촌동 골목 그 100여년의 이야기
숱한 일본인, 그리고 훗날 북성로산업1번지를 위해 공헌해온 기술자들의 체취가 묻어있는 일제적산가옥의 묘한 뉘앙스.


일제가 폐망하고 물러났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인은 기술사각지대에 방치돼 있었다. 훗날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기술력을 잘 응용해 굴지의 북성로거리를 만들었다. 득영닥트의 이득영, 선일포금의 최학용, 대길기업사의 차장오, 성일공업사의 이말종, 옥천정밀기어의 권영옥, 영진정밀의 임복만, 대호발전기의 곽철대, 동명스프링의 장근수, 경우기계의 김욱동…. 그들이 ‘북성로공화국’의 개국공신. 한때 나이트클럽 밴드마스터의 길을 걷다가 후발주자로 쇠의 길을 걷게 된 백상종합기계의 이철우씨(49)는 최고 막내격이다. 2003년 늦깎이로 북성로에 입성한다. 누나가 경영하던 대현종합기계에서 기본기를 닦은 뒤 스스로 인터넷을 뒤져 자기만의 기술을 터득한다. 그래서 이 거리에선 ‘딘가이버’(제임스 딘과 맥가이버 합성어)로 불린다. 음악하던 사람이 철인이 된 걸 그렇게 예우해준 것이다. 그가 공군에 납품한 160마력짜리 디젤대형 활주로 커터기. 그의 자부심이다.

이 거리의 손들은 늘 쇳가루에서 발효돼 ‘쇠꽃(鐵花)’으로 개화된다. 이 로드는 대구 근대스러움의 첫 단추다. 낮에 들리던 공구 두드리는 소리는 밤이 되면 향촌동 술집으로 건너가 ‘젓가락 장단’으로 피어난다. 춤도 추고 사랑도 나누었다. 그리고 예술(문학)은 그걸 잘 승화시켰다. 그게 최근 이하석 시인(대구문학관장)이 발표한 연작시 ‘향촌동랩소디’다.

북향로드의 절정은 1950~80년대. 하지만 90년대로 넘어서면서 일락서산(日落西山) 형국으로 저물기 시작한다. 유채색에서 무채색으로 쓰러진 북향로드. 할렘가로 방치된다. 해가 질 것 같지 않던 향촌동 술집과 주부센터 등 일식당 등이 거의 문을 닫는다. 그 자리에 수제화공방, 실버를 위한 성인텍·고스톱방·구제의류가게가 새로운 생태계를 형성한다. 2011~2013년 폐허를 딛고 카페 삼덕상회·믹스카페 북성로·소금창고가 들어선다. 구상 시인이 6·25전쟁 때 북성로 초입 ‘꽃자리다방’에서 발표한 시집 ‘초토의 시’ 같은 기운을 갖고 있었다.

동면 중인 읍성의 돌도 발굴돼 시민에게 공개됐다. 골목운동가, 조각가, 화가, 시인, 교수 등이 ‘대구근대골목투어’를 지원사격하면서 북향로드 리노베이션에 일조한다. 하지만 도심재생사업으로 피어나는 건물도 있지만 완전히 사라지는 현장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도원동 홍등가 ‘자갈마당’이었다. ☞ W2면에 계속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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