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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정문태의 제3의 눈] 긴 하루를 위한 짧은 일기

2020-02-14

대기오염·신종코로나 확산
서로 경계하는 눈길 숨막혀
몸과 마음 자유로움 느낄때
마스크 없어도 해방감 만끽
시민안전 지키는 정치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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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분쟁 전문기자

아침 7시, 들뜬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오랜만에 만날 벗들 얼굴이 걸음마다 차오른다. 치앙마이 공항으로 가는 택시에 올라 도이수텝 산자락을 바라보며 하루를 연다. 아아, 오늘도 또 도이수텝 꼭대기가 사라졌다. 누런 하늘에 숨이 막힌다. 휴대폰을 연다. 대기오염지표(AQI)가 220을 가리킨다. 해마다 12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치앙마이를 비롯한 태국 북부 사람들이 겪어온 이 고난은 올해도 날마다 150~250을 찍어댄다.

지난해 이맘때는 두어 달 동안 300~500을 오르내렸고, 한동안 860까지 치솟기도 했다. 이 분야 세계기록을 나날이 경신하며. 서울에서는 100이 넘으면 난리가 난다는 바로 그 지표다. 태국, 라오스, 미얀마 국경을 넘나드는 화전 연기 탓이다. 10여년 전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공룡농산자본들이 곳곳에 플랜테이션을 차리면서부터 벌어진 일이다. 시민은 숨 막혀 죽든 말든 정부는 본체만체.

잡친 기분으로 들어선 치앙마이 공항, 이번에는 서먹서먹한 풍경에 더 숨이 막힌다. 공항 직원이고 여행객이고 모두들 마스크에 숨어 말을 잊은 채 서로를 수상하게 노려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의 공포에 질린 세상은 그야말로 단절이다.

비행기 안은 섬뜩한 기운마저 돈다. 중환자실인지, 인체실험실인지. 승객들은 마스크를 안 쓴 나를 비롯한 몇몇 서양 관광객을 오히려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이 마스크 지옥 덕에 타이가 세계보건안전지수(GHSI) 6위에 올랐는지도 모르겠다. 믿거나 말거나, 톱10에 이름을 올린 아시아 국가는 태국과 대한민국(9위)뿐이라고.

방콕 돈므앙 공항에서부터 전철 안과 거리 풍경도 치앙마이와 다를 바 없다. 여기도 마스크 지옥이다. 마치 생화학전을 벌이는 도시마냥. 8일 현재, 태국 보건부는 잠재적 감염자 654명을 조사했고, 그 가운데 375명이 입원 중이며, 32명이 감염자라고 밝혔다.

낮 12시, 노래잔치판 '혁명가(革命歌)를 기리며'에 초대한 그림쟁이이자 소리꾼인 와산 시티켓과 함께 방콕 북쪽 150㎞ 지점 싱부리로 간다. 논 한가운데 차린 무대 언저리에서 반가운 얼굴들과 오랜만에 얼싸안는다. 태국 최고 지성으로 꼽는 티라윳 분미(전 탐마삿대학 사회학 교수), 통템 나탐롱(언론인, 시인), 수니 차이야로스(랑싯대학 사회학 교수) 같은 이들은 논두렁 토론으로 역사적 경험을 풀어낸다. 와산과 카라완 같은 소리꾼들은 젊은 노래패와 함께 가슴을 파고드는 혁명가로 무대를 달군다. 이 이름들은 모두 1970년대 민주화투쟁을 이끈 학생 운동가로 군사독재의 학살에 맞서 타이공산당 무장투쟁에 뛰어들었던 역사의 한 대목이다.

태국 전역에서 몰려든 철지난 '빨갱이' 300여명이 모인 소박한 잔치판이지만 세상을 바꾸고 싶은 심장들이 뿜어내는 열기만큼은 온 천지를 뒤흔든다. 무엇보다 단 한명도 마스크를 쓰지 않은 잔치판에서 몸도 마음도 한껏 자유로움을 느낀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대기오염과 바이러스에서 해방된 세상을 누린다.

밤 10시,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무대를 아쉽게 바라보며 뒷걸음질로 빠져나온다. 방콕을 향해 운전대를 잡은 쁘리다 코워반(출판인)이 라디오를 켠다. 나콘랏차시마 무장군인의 시민 17명 총격 살해 속보가 정적을 깨트린다. 잔잔히 흐르던 싱부리의 감흥이 이내 사라진다. 다시 현실로 되돌아온다. 대기오염, 바이러스, 무장군인의 만행으로 이어진 2월8일은 가장 기본적인 시민의 안전마저 지켜주지 못하는 정치에 심각한 의문을 남긴 길고 긴 하루였다. 우리는 모두 어디로 가고 있을까? 혁명가를 멈출 수 없는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국제분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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