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과 노예' 유럽 왕족 富의 상징
현대, 각종 성인병 원인 毒의 상징
日, 16C 포르투갈서 받은 별사탕
韓, 녹말 맥아 효소 '조청'이 대세
단맛에 취하며 '설탕공화국' 변화
설탕은 사탕수수를 원당으로 해서 가공한 식재료다. 사탕수수는 10세기쯤 아랍인이 대규모로 재배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부터 냉대와 온대에서도 재배되기 시작한 사탕무는 사탕수수에 비해 당도가 많이 떨어진다. |
제일모직이 처음 설탕을 대량생산할 당시의 누른 종이로 만든 설탕 포대. |
설탕의 원전은 '사탕수수'. 19세기부터 냉대와 온대에서도 재배되기 시작한 사탕무는 사탕수수에 비해 당도가 많이 떨어진다. 사탕수수가 열대의 산물인 탓이다. 10세기쯤 아랍인이 대규모로 재배하기 시작한 것으로 식품사학자들은 추정한다. 이후 인도네시아 자바섬과 카리브해역 등이 설탕의 메카가 된다.
유럽은 설탕을 모르고 살았다. 십자군 전쟁 때 비로소 그 존재를 알게 된다. 커피와 붙어 다녔던 설탕은 훗날 원유에 버금가는 부의 상징이었다. 유럽 왕족의 달달한 혓바닥, 그걸 위해선 사탕수수 농장의 노역을 감당해야 될 희생양이 필요했다. 바로 흑인 노예다. 흑인역사가 에릭 윌리엄스는 "설탕이 있는 곳에 노예가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미국의 인류학자 시드니 민츠는 사치품이었던 설탕을 18세기 유럽의 가정에서도 쉽게 먹을 수 있게 된 데는 중남미 설탕 플랜테이션으로 팔려간 아프리카 노예들의 노동력이 있었다고 했다. 설탕의 생산과 소비에 세계 3개 대륙이 동원된 것이다.
일본의 역사학자 기와기타 미노루가 펴낸 '설탕의 세계사'는 약(藥)으로 출발해 현대로 접어들면서 각종 성인병을 일으키는 독(毒)의 상징이 된 설탕의 연대기를 잘 정리해 놓았다. 설탕이 처음부터 '배척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은 아니다. 과거 이슬람이나 중세 유럽에서 설탕은 가장 흔히 쓰이는 약재였다. 하얀 설탕 장식은 '권위의 상징'이기도 했다. 유럽 왕후귀족 연회에는 항상 설탕 데코레이션(Decoration)이 등장한다. 마지막에는 반드시 파티장에 모인 사람들이 데코레이션을 부숴 남김없이 나눠 먹었다. 유럽발 달달 디저트의 전통은 지금도 위력을 발휘한다. 유럽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풀코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디저트 중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크림 브륄레(Creme Brulee)'. '불에 그을린 크림'이라는 뜻으로 커스타드 크림을 그릇에 담은 뒤 크림 위에 설탕을 뿌리고 불에 그을려서 캐러멜화 시킨 것이다. 설탕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는 디저트였다.
유럽의 설탕 문화를 자국에 맞게 변주하는데 가장 성공한 나라는 바로 일본이다. '화과자(和菓子)'의 나라인 일본인의 세포는 설탕으로 구성돼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달달한 걸 좋아한다. 일본 설탕의 기원은 1569년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당시 천하를 호령하던 쇼군이었던 오다 노부가나에게 선물로 건넨 '별사탕'이다. 그게 훗날 별별 사탕으로 발전해 우리의 치아를 노렸고 별사탕은 훗날 한국 군대 별식의 대명사로까지 명맥을 이어간다. 일본은 훗날 청일전쟁에 이겼을 때 대만에 대규모 사탕수수농장을 만들어 설탕을 착취해왔다.
우리는 설탕보다 '조청(造淸)'이 대세였다. 조청은 보리나 쌀에 들어있는 녹말을 맥아(엿기름)의 효소를 이용해 추출한 다음 삭히고 건더기만 걸러 푹 졸인 것이다. 비슷한 물엿과 혼동되기도 하지만 차이점이 있다. 찬물에 넣어도 잘 저어 주면 물과 섞이는 물엿과 달리, 조청은 찬물에 넣고 저으면 숟가락에 마구 엉겨 붙는다. 조청을 굳힌 뒤 잡아당겨 하얗게 가공하면 엿장수표 '갱엿'이 된다.
개항 전까지는 결핵치료제, 해열제 등 별별 약재로 대접받는다. 왕실에선 자양강장제로 썼다. 1900년대 조선의 개화론자들은 '서구인처럼 설탕을 많이 먹어야 문명화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갓난아기에게 주는 모유나 우유에 백설탕을 첨가할 것을 권할 정도로 설탕을 맹신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전통적으로 한국 음식에 단맛이 적다는 것을 확인한 일본 상인들이 설탕이 많이 들어간 과자, 빵 등을 파는 가게를 하루가 멀다 하고 열어 우리 입맛을 공략했다.
어느 날 대한민국도 단맛에 취해 '설탕 공화국'으로 돌변하기 시작한다. 설탕! 그건 대한민국 식품계의 복음이나 마찬가지였다. 1920년 일본 굴지의 제당업체인 '대일본제당'은 평양에 사탕무를 원료로 한 공장을 세웠다. 그러나 생산능력의 한계로 인해 대부분은 일본에서 생산 가공된 완제품이 수입됐다. '한국형 설탕시대'를 열고 싶었던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오늘의 삼성그룹을 일군 '이병철'이었다.
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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