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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준의 스토리 오브 스토리 .38·<끝>] 하인리히 뵐의 소설을 통해 확인하는 '언어 찾기'의 필요성

2020-06-18

거짓 기사가 판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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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학부장·문명시민교육원 원장)

27세 여성 카타리나 블룸이 신문기자 퇴트게스를 총으로 쏴 살해한다. 인터뷰 약속으로 그녀 집을 찾아온 퇴트게스가 죽기 직전 뱉은 말은 '나의 귀여운 블룸 양, 우리 일단 섹스나 한탕 하는 게 어떨까?'였지만, 성희롱이나 성폭력 때문에 그녀가 총을 쏜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한 일, 그녀의 삶을 완전히 파멸시킨 거짓 기사를 계속 써 댔기 때문이다. 1974년 2월24일 독일에서 벌어진 일이다.

실제 사건은 아니다. 197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독일 소설가 하인리히 뵐의 1974년 발표작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민음사, 2008) 이야기다. 작품 속에서 작가 자신이 '이야기의 옷을 입은 팸플릿'(147쪽)이지 소설은 아니라고 하지만, 뵐이 만들어 낸 허구적인 서사문학 곧 소설이다. 물론 뵐의 문학 세계 일반이 그런 것처럼 이 소설 또한, 전후의 폐허를 딛고 일어서며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겪고 있던 당대 독일 사회의 실제 문제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역자 김연수가 설명해 주는 대로 1970년대 독일 사회 전체를 뜨겁게 달구었던 테러리즘과 언론의 폭력에 대한 논쟁에 닿아 있는 것이다(158쪽).

카타리나 블룸은 상류층 집안의 가정부로 일하면서 리셉션, 파티, 단체 모임 등의 프리랜서 관리인을 겸하는 독신 여성이다. 어려운 가정환경을 겪었고 한 차례 결혼한 적이 있는데, 휴가를 가 본 적도 춤을 춰 본 적도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열심히 일하며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 최근에 아파트를 마련하고 차를 소유한 것을 제외하고는, 극도의 근검절약을 실천하며 살고 있다. 여성 카니발을 맞아 주어진 휴가 기간에 먼 친척의 집에서 열리는 댄스파티에 모처럼 참석했다가 루트비히 괴텐이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져 평온했던 일상을 잃게 된다. 그녀가 줄곧 함께 춤을 추고 자기 집으로 데려왔다가 몰래 빠져나가게 해 준 괴텐이 은행강도 및 살인 사건 용의자로서 줄곧 경찰의 감시하에 있던 인물이어서 경찰의 심문을 받게 되고, 그 내용이 왜곡, 과장되며 신문 일면을 장식하게 된 까닭이다.


댄스파티 다녀온 후 살인자가 된 女주인공
이념·선정성 앞세운 언론의 사실왜곡 보도
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 파멸시키는가 고발

70년대 獨 달군 테러리즘·언론의 폭력논쟁
우리 현실엔 안 맞는 먼 나라 과거지사일까…


신문기사에서 그녀는 살인범의 약혼자이며 빨갱이 조직의 일원이고 가족을 돌보지 않는 패륜적 인간이 되어, 같은 아파트 주민들을 포함하여 불특정 사람들의 희롱과 냉대, 협박을 받는다. 문제는, 신문이 써 댄 이야기 모두가 실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사태는 악화일로를 걷는다. 자신에게 추근대던 상류층 인사의 명예를 생각해서 입을 다무는 태도가 그녀에게 불리한 상황을 조장해 가고, 신문기자는 더더욱 사태를 과장하여 그녀를 악녀로 만들고 암 수술 직후의 그녀 모친이 사망에 이르게까지 한다. 이러한 사태 전개 속에서 자신이 완전히 파멸된 것을 확인한 카타리나 블룸이, 인터뷰 요청을 해 온 기자를 만나 총을 쏜 것이다.

이상이 여주인공의 스토리이지만 이 소설의 주제 효과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두 가지를 지적할 만하다. 작가-서술자가 '일종의 배수 혹은 물 빼기 작업'이라고 명명한 대로(11쪽) 사태의 전말과 진실을 제대로 밝히기 위해 조심스럽게 다각도로 진행하는 서술 방식 자체가 의미를 갖는다. 진실의 규명은 단정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러한 방식이 작품 속 언론사의 행태와 극명하게 대조되면서 얻게 되는 부수적이지만 강력한 의미 효과도 여기에 더해진다. 부연이 필요할까. 신문이란 거짓말투성이란 고발 말이다.

또 한편으로는, 작가의 관심이 사람 사이의 언행이 가하는 폭력에 집중되면서 생기는 효과다. '차이퉁'이라는 작품 속 가상의 신문과 달리 작가는 피가 튀는 식의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내용은 삼간 채 그에 못지않게 폭력적인 미시적인 대화 상황에 세심한 눈길을 준다. 여러 차례의 심문에서 수사과장이 던지는 무례하고 부주의한 말들이 블룸의 입을 다물게 하는 맥락을 섬세하게 짚는 것이 대표적이다. 더불어 지인들의 명예를 존중하고 자신의 사생활이 침해되지 않도록 입을 다무는 블룸이 바로 그러한 행동으로 심문 과정에서 불이익을 당하게 되는 상황을 묘파하는 것도 주의할 만하다. 이러한 점은, 작품 말미에 달린 '10년 후 -하인리히 뵐의 후기'에서 밝힌 바 "언젠가 한때 휴머니즘의 교양을 갖춘 적이 있었던 서양 사회"(147쪽)를 환기하면서, 언론과 권력의 횡포가 그것을 어떻게 짓밟아 버렸는지를 폭로하는 효과를 낳는다.

물론 이 소설의 중심 주제는 선명하다. '어느 젊은 여자가 댄스파티에 갔었는데, 나흘 후에 그녀는 살인자가 된다. 잘 들여다보면 그것은 신문 보도 때문이었다'(136쪽)라는 진단이 명확히 드러내듯, 이념과 선정성을 앞세운 언론의 사실 왜곡이 한 인간을 어떻게 파멸시키는가에 대한 고발이다. 언론에 대한 비판이 '후기'에서는 더욱 명료하게 천명된다. "'차이퉁'은 그들 자신들의 범죄 행위만 좋아하고, 맘에 들지 않거나 분명하지 않은 사실은 모조리 조작한다. 심지어 조작되지 않은 사실조차 그 신문에서는 거짓말로 보이게 되어 완전히 거짓으로 흡수된다. 간단히 말해, 그 신문은 진실을 '진실에 맞게' 재연해도 진실을 더럽힌다. (중략) 수천 번 거짓말한 사람이 설사 한 번 진실을 말한다고 해도 나는 그를 신뢰하지 못한다."(148쪽)

하인리히 뵐의 이러한 태도가 지나친 것일까. 적어도 2020년 오늘 우리의 현실에는 맞지 않는 저 먼 나라의 과거지사일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우리나라의 신문들에 '아니면 말고' 식의 기사가 얼마나 많았으며 그에 반해 잘못된 기사에 대한 정정보도는 얼마나 적고 무성의했던가. 종이 신문 외에 인터넷판까지 만들면서 신문의 신뢰도가 한층 더 추락한 지 제법 오래되었는데, 이러한 사태 악화가 비단 경영상의 문제 때문은 아니라 생각된다. 자신만이 옳다는 이데올로기적인 맹목에 갇혀서 '제4의 권력'을 마구 휘두르는 무책임성이 주된 요인일 터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아무리 막강한 절대 권력도 그들만큼 항상 권력을 마구 휘두르지는 않는다"(152쪽)라는 하인리히 뵐의 지적이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유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겠다.

다시 역자에 따를 때, 뵐은 전후 독일 문학의 중요한 과제로 '사람이 살 만한 나라에서 사람이 살 만한 언어를 찾는 일'을 들었다 한다. "보통 사람들이 살 만한 공간에서 서로 의사소통을 하면서 신뢰할 수 있는 이웃을 발견할 수 있도록 언어를 회복하는 작업, 즉 '언어 찾기'가 동시대 문학의 중요한 과제라고 보았던 것"(156~7쪽)이다. 우리 시대의 문학이 그러한 역할을 얼마나 하는지 이 자리에서 따질 여력은 없지만, 문학의 그러한 역할이 우리 사회에서 절실히 요청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대한민국의 역사 내내 우리나라의 신문들이 공론장의 언어를 매우 심각하게 훼손해 온 사실, 정치적인 지향이 다른 인물들을 집중적으로 파헤쳐 위험 분자로 만들어 온 행태, 언어의 윤리를 전혀 생각지 않는 한심한 기자들을 앞세워 무력한 개인들의 인권을 유린해 온 선정적인 보도 방식 등을 생각하면, 달리 판단할 여지가 없다. 신문들의 이러한 행태가 공론장 전체에 퍼진 상황을 생각하면, '언어 찾기'가 절실해진 사태에 대한 신문의 책임이 더욱 선명해진다.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학부장·문명시민교육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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