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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건축의 전설 厚堂 김인호' 2 ...모두가 손사래 친 기둥없는 지붕, 틀을 깨부수니 솟아올랐다

2020-11-13

대구 건축의 전설 厚堂 김인호 2 ...모두가 손사래 친 기둥없는 지붕, 틀을 깨부수니 솟아올랐다
실내에서 올려다본 경북실내체육관 천장의 아름다운 곡선의 흐름. 중심부의 아치형 보는 엄청난 하중을 상쇄시키기 위해 대나무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덕분에 제1회 대한건축사협회 한국건축전 대상작이 된다.


경북체육관의 총공사비는 37억여원. 이 중 70%가 시민들의 성금이었다. 대구를 상징하는 건축이란 공감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액수였다. 지름 80곒에 달하는 거대한 지붕을 안전하게 만드는 게 난제 중 난제였다. 지붕과 벽의 구분을 없애고 지초에서 꼭대기까지 원스톱으로 흘러내리는 모양이다. 정식 공법 명칭은 '철근 콘크리트 라멘조 3 Hinge 아치(트러스) 지붕마감'. 체육시설이기 때문에 널찍한 공간 확보가 관건.

실내체육관 특성상 기둥 사용은 어려웠다. 아치형 곡선을 안전하게 처리하기 위해선 수많은 포인트마다 달라지는 곡률을 고차미적방정식처럼 풀어야만 했다. 후당은 한옥에서 한국미를 찾으려 했다. 세로와 가로를 연결하는 대들보와 서까래, 그리고 지붕 가장자리의 추녀의 날렵한 선. 그걸 콘크리트 덩어리에 구현하고 싶었다. 그에겐 콘크리트가 하나의 캔버스였다.

신라의 화랑들이 전투할 때 사용했던 투구 모양을 기본 모티브로 설정했다. 그리고 관중이 빨리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동서남북에 사찰의 일주문 스타일의 출입문을 세팅했다. 화랑정신과 스포츠정신을 연결시킨 건 '전통 없이 현대 없고 현대 없이 전통 없다'는 후당만의 '법고창신(法古創新)' 철학이었다.

아치 지붕 난제 한옥서 푼 천재
'실내체육관의 사내' 전국적 명성

허물어져 있던 불국사 경내 복원
우주선이 나는 듯한 잠실야구장
버선코 같은 대구시민회관 지붕
그의 손닿은 모든건축에 한국美

57년 궤적, 대구경북건축이정표
대구문예회관 厚堂 회고전 마련

◆기둥 없는 체육관 짓자

공사가 막바지로 진입하고 있었다. 천장을 받쳐주던 임시 가설 기둥을 제거하는 날이었다. 작업에 투입될 인부들의 표정이 잔뜩 긴장해 있다. "저 기둥을 제거하면 지붕이 무너져 내릴 수도 있잖아요!" 선뜻 나서는 자가 없었다. 보다 못한 후당이 직접 나서 그걸 제거했다. 공법상 준공 이후 천장이 자연스럽게 5㎝가량 아래로 내려앉는 것으로 예측됐다. 하지만 훗날 그 천장은 3㎝ 정도만 낮아졌다. 후당의 기술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려준 것이다. 두부모 자르기 같은 직선형 공사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에겐 이 건축이 참으로 곤욕스러운 작업일 수밖에 없었다. 노랑 빛깔의 천장 구조물은 너무나 회화적이었다. 34세의 후당. 그가 잉태한 그 체육관은 하나의 건물이 아니라 예술작품이었다.

반세기 이상의 세월이 지났다. 별로 기억해주는 이가 없다. 대단위 빌딩이 도심 곳곳에 세워지면서 그 체육관은 낡아 보일 수밖에 없다. 경제논리를 갖다 대 철거하기 일쑤다. 춘천실내체육관도 그렇게 사라졌다. 머잖아 도심뉴딜재생사업 일환으로 철거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아파트, 복합상가, 대형마트 등이 들어설 것 같아 우려된다. 도살장이던 중국 상하이 '라오창팡(老場坊)1933'은 문화예술 창조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저 공간을 대구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신개념 랜드마크로 존속시키면 어떨까. 제1회 대한건축사협회 한국건축전 대상작이니 건축사적으로도 중요하다. 관심이 사라지면 모든 게 사라지는 법이다.

대구 건축의 전설 厚堂 김인호 2 ...모두가 손사래 친 기둥없는 지붕, 틀을 깨부수니 솟아올랐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대구문화예술회관. 불교에 심취한 후당만의 불국토 이미지가 어른거린다.



◆불국사 복원에 참여

일반인에겐 생소한 이름 김인호. 대구의 건축이 올드버전에서 뉴버전으로 터닝하게 만든 1세대 토착 건축장이. '코리아니즘 건축철학'을 발흥시킨다. 69년부터 4년간 황폐하게 방치돼 있던 불국사를 현재 모습으로 바꿔놓는다. 상당수 관광객은 지금 불국사의 모습이 천년전 모습이라 착각한다. 아니다 엄청난 성형수술을 받은 결과다. 그 집도의 중 한 명이 후당이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독려를 많이 했다. 충무공 이순신, 신라 화랑도 정신을 앙양시키려 했다. 덕분에 불국사 경내 허물어져 터만 남아있던 무설전, 비로전, 관음전, 범영루, 좌경루, 회랑 등이 제모습을 갖게 된다. 이 과정에 고도보존법이 가동된다. 경주 구도심에는 2층 이상의 건물을 구축 못 하며 기와로 지붕을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다.

불국사 복원설계위원회는 김인호를 비롯하여 김정기, 신영훈, 김동현 등으로 구성됐는데 이들은 훗날 '현대판 김대성'이란 평가를 받게 된다. 미담 사례도 이어진다. 당시 한 작업자가 사명감을 갖고 몇 년에 걸친 복원 일정을 깨알처럼 기록했다. 귀한 자료는 이후 한양대박물관으로 건너갔고 현재 불국사 성보박물관과 공유되고 있는데 이번 기념전 때 그 일부가 공개됐다.

시리즈는 계속된다. '경주 화랑의 집'(71년)은 신라사찰의 가람배치 형식을 차용한다. 일주문을 지나 불단에 이르는 점승적 과정을 축약시켜 놓은 것 같았다. 'ㅁ'자 구조가 하나로 연결된 화랑교육원은 한국 고건축을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국내 첫 건축물이다. 향교의 명륜당을 중심으로 한 동재와 서재를 닮게 했다.

56년 청구대학(영남대 전신)을 좁업한 그는 한국건축사를 특화시킨다. 해인사 조영계획에 관한 고찰, 동화사 조영계획에 관한 고찰, 황룡사지에 대한 고찰 논문을 바탕으로 황룡사 9층 목탑 복원안을 발표한다. 주요 건축물을 설계할 때 항상 '한국미'를 주제로 잡았다.

1907년쯤 철거된 대구읍성, 그중에서도 영남제일관(1979) 중창에 나선다. 대구부사에 실린 사진을 토대로 했다. 이와 함께 동화사 동화문(1987), 단양 구인사(1985) 등을 짓는다. 79년에는 판문점에 높이 300곒에 달하는 민족통일기원탑을 전통양식으로 설립할 예정이었는데 무산돼 미발표작으로 남게 된다.

대구 건축의 전설 厚堂 김인호 2 ...모두가 손사래 친 기둥없는 지붕, 틀을 깨부수니 솟아올랐다
장구 측면 북편과 비상하는 우주선 형상을 한 잠실야구장.


◆대구시민회관과 문화예술회관 건축

경북체육관으로 빅히트를 치자 서울로부터 러브콜이 들어온다. 88서울올림픽을 겨냥한 잠실야구장 설계(1977)가 지명현상 설계에서 당선된다. 지역 건축가로선 처음이다. 이에 앞서 춘천실내체육관, 대전충무실내체육관, 대구스포츠센터, 대구두류축구장에 힘입어 그는 '실내체육관의 사내'로 소문난다. 성공을 위해 매일 향불을 피워놓고 수행승처럼 참선을 했다. 어느 날 밤, 꿈에서 비상하는 우주선을 보게 된다. 하나의 선몽이었다. 그는 야구공의 스피드를 우주선의 비상으로 연결시켰다. 전체 이미지는 장구의 측면인 북편과 강강술래를 차용했다.

대구시민회관과 대구문화예술회관은 후당의 건축미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철거된 대구공회당 자리에 들어선 대구시민회관. 새가 비상하듯 버선코를 연상하듯, 비행기가 이륙하는 듯한 진취적이고 웅장한 지붕선은 경북체육관과는 또 다른 기운이었다. 구조 중 가장 압권은 정면에 늘어선 5개의 거대한 열주였다. 기둥이 지붕을 단순히 받쳐주지 않고 지붕을 뚫고 올라가 지붕을 현수교처럼 매달아 놓은 구조미의 절정이다. 대구역 바로 옆에 있어 위치적으로 장단점을 안고 있었다. 기차 선로와 무대 후면 벽과의 사이가 십수 미터에 불과했지만 이를 극복한다.

80년대가 밝았다. 정부의 문화진흥정책이 가속화된다. 문화예술회관은 두류공원 남측 기슭에 위치하여 성당못을 전면에 두고 있다. 당초 두류도서관 근처에 들어설 뻔했는데 그가 관계 공무원을 설득해 지금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는 좌향을 위해 풍수지리학에 심취한다. 1천100석의 대공연장(팔공홀)의 지붕선은 승무의 갑사고깔을 의미하고 전시관 외관은 대구의 시화인 목련, 그리고 공연동과 전시동의 동선을 아리랑의 율조로 그려낸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육각형 벌집이 연꽃처럼 점점이 수가 놓인 것 같다. 불교에 심취한 후당이 앞산을 바라보는 그 자리에 불국토(佛國土)를 구현하려 했던 건 아닐까. 하지만 정작 후당은 그 개관식을 못 본다. 로컬 건축가라서 그랬을까?

대구 건축의 전설 厚堂 김인호 2 ...모두가 손사래 친 기둥없는 지붕, 틀을 깨부수니 솟아올랐다
철거된 대구공회당 자리에 건립되고 있는 대구시민회관. 현재는 대구콘서트하우스. 후당만의 한국미를 간직한 장중한 지붕선이 인상적이다.


◆막강한 대아사단

그의 어록 중 가장 인상적인 대목. '졸업 후 5년 경험해야 건축을 알고, 건축사 자격증 따고 10년 지나야 건축 흐름을 알고, 나이 50이 지나야 나름대로 혼이 들어간 건축을 할 수 있다.'

건축가라기보다 현자(賢者)의 풍모를 가졌던 후당. 65년에 옛 만경관 근처에서 개소한 동방건축설계연구소(68년부터 대아건축설계연구소)는 전통건축과 현대건축을 컬래버할 수 있는 광범위한 연계 기술망을 공유하고 있었다. 대아기술공단, 토목설계팀, 설비팀, 투시도팀 등까지 대아는 A부터 Z까지 온갖 건축을 원스톱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후 수제자라 할 수 있는 합동건축사무소장 대표 권태식을 비롯해 계명대 건축공학과 교수 이중우, 대구 최초 여자 건축사 겸 세명건축사무소장 김화자, 현대건축사무소장 김무권 등 40여 명의 기라성 같은 제자들을 배출한다.

57세, 너무나 젊은 나이에 서둘러 이승을 떠난 후당. 88올림픽 3인방(김인호, 김중업, 김수근)설계자가 개막 직전에 모두 타계해 사람들은 '저 세상에서 올림픽이 열리나' 라고 하였다. 그를 위해 대구예총은 대구시민회관 광장에서 시민장 규모로 노제를 엄수했다. 건축가들은 제 부모를 여읜 것처럼 슬퍼했다.

그의 타계 소식을 제때에 알린 단체는 대한건축학회뿐이었다. 88년 7월호 말미에 단 몇 줄의 부고가 초라하게 실려 있었다.

후학들은 일찍 타계한 스승을 기리기 위해 1989년 '후당 김인호 교수 기념사업회'를 발족하고, 1998년 '후당 건축상'을 제정하여 그의 건축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 문화예술회관 개관 30주년 후당 기념전도 그 연장이랄 수 있다.

글=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厚堂 김인호가 건축한 작품들

청구대학 본관 문화동, 경북도청, 경북체육관, 잠실야구장, 불국사 복원, 경주 화랑의 집, 대구시민회관, 대구스포츠센터, 대구향교 복원, 경북고 체육관, 대구의사회관, 영주 부석사 복원, 대보·무궁화 백화점, 영남제일관문 중창, 두류실내수영장, 안병근기념유도관, 팔공산관광호텔, 대구문화예술회관, 안동민속박물관, 동화사 동화문 등 100여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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