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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고 싶은 대구의 공간 .3] 역사공간, 도동서원·옻골마을

2020-11-20

공간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 따뜻하거나 아늑하고, 때로는 신비롭고 경이로운 감정을 느끼게 한다. 어떤 공간은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공간 자체가 만들어내는 기운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간이 역사성을 갖게 되면 그 힘은 더욱 증폭된다. 사람의 이야기가 더해져서다. 이러한 공간은 시대와 시대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된다. 역사의 일부이자 세대 간 통로로 활용되는 것이다. '머물고 싶은 대구의 공간' 3편에서는 지역의 대표적인 역사 공간인 도동서원과 옻골마을에 대해 다룬다.

조각보 펼친 듯한 중정당 기단…서원 지키는 '400년 은행나무' 장관
#1.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도동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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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루에서 바라본 도동서원. 환주문 뒤로 서원의 중심이자 강학 공간인 중정단이 보인다. 도동서원은 한훤당 김굉필의 도학과 덕행을 숭상하기 위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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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굉필의 외증손 정구가 서원 중건을 기념하기 위해 심은 은행나무. 높이 25m에 둘레는 8m79㎝에 달한다.


대구에는 선조들의 얼과 유산이 담긴 역사적 공간이 산재해 있다. 조선시대 선비문화를 엿볼 수 있는 서원도 대표적인 역사 공간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각 서원에는 인격 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학문에 매진하던 선비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대구의 서원을 논할 때 가장 먼저 거론 되는 곳이 도동서원(道東書院)이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도학과 덕행을 숭앙하기 위해 세운 이곳은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됐다.

김굉필은 정몽주(鄭夢周)에서 길재(吉再),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을 거쳐 조선 성리학의 계보를 잇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평생 '몸가짐을 바로 세우는 일'에 몰두하며 성현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도동서원은 그의 참된 정신이 수백 년간 이어져 온 곳이다.

도동서원은 역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심미적인 가치도 높다. 조선 중기 이후 '서원 건축의 정수'라고 평가될 정도로 건축미가 빼어나다. 아름다운 주변 풍광도 서원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한층 더해준다.

서원의 정취를 제대로 느끼려면 가을철에 방문하는 게 좋다. 서원 앞에 서있는 은행나무가 노란 옷으로 갈아입을 때가 최적기다. 수령 400년 된 은행나무 앞에 서면 그 우람한 풍채에서 나오는 위엄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세월의 모진 무게를 감당하느라 일부 가지가 땅으로 내려앉은 모습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이 나무는 김굉필의 외증손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서원 중건을 기념하기 위해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서원은 낙동강과 진등산 사이에 위치한다.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에 둥지를 틀었다. 주요 건물은 중심축을 따라 경사면에 반듯하게 자리잡고 있다. 수월루(水月樓)와 환주문(喚主門), 중정당(中正堂), 내삼문, 사당이 일렬로 서있다.

정문인 환주문은 맞담에 세워져 있다. 성인이 드나들기엔 문 높이가 낮다. 갓 쓴 유생이라면 고개를 숙여야 들어설 수밖에 없는 구조다. 입구에서부터 예를 갖추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 환주문을 지나면 강학 공간인 중정당을 만난다. 극도로 절제된 미를 느낄 수 있다. '중정(中正)'은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는 중용(中庸)의 상태를 뜻한다. 도동서원의 교육 철학이다. 중정당에는 서원 편액이 안쪽 벽면과 앞처마 두 곳에 걸려 있다. 벽면 편액은 선조가 내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강이 스승 퇴계 이황의 글씨를 집자했다고 한다.

중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구조다. 특히 전면에 굵은 민흘림기둥 여섯 개가 눈길을 끈다. 크기도 큰 데다 기둥 윗부분에 둘려진 흰 종이 때문이다. 이른바 '상지(上紙)'다. 도동서원 유사들에 따르면 상지의 역할은 이곳이 경의를 표해야 할 곳임을 알게하는 표식이다. 중정당의 기단도 눈여겨볼 만하다. 모양과 재질이 서로 다른 돌들이 4각형, 6각형, 8각형 등의 모양으로 다듬어져 빈틈없이 맞물려 있다. 색상도 옥빛, 흙빛, 분홍빛, 회색빛 등 제각각이다. 마치 조각보를 펼쳐 놓은 듯하다.

중정당 좌우엔 거인재(居仁齋)와 거의재(居義齋)가 마주보고 있다. 서열이 높은 유생들은 동재(거인재)에, 그보다 어린 유생들은 서재(거의재)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내삼문의 구조도 특이하다. 사당으로 향하는 세 개의 문 중 서문쪽 계단이 없다. 귀신이 출입하는 중앙문(귀문)을 제외하고, 동문으로 들어간 뒤 동문으로 나와야 한다. 동입서출이 아닌 동입동출이다. 사당에는 김굉필과 정구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서원 담장도 그냥 지나쳐선 안된다. 중정당, 사당과 함께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다. 산석으로 쌓은 후 그 위에 흙과 기와를 사용해 담장을 이었는데, 형태와 구성이 매우 뛰어나다.

글=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자문=송은석 대구문화관광 해설사

'대구 最古 가옥' 백불고택…느티나무 군락은 포토존으로 명성 높아
#2. 조선시대 정취를 간직한'옻골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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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가장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백불고택은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가옥이다. 전통 한옥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어 국가민속문화재 제261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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옻골마을 입구에 위치한 느티나무 비보숲. 나쁜 기운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위해 조성됐다.


대구 도동 측백나무숲 인근에는 조선시대 전통 한옥마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경주 최씨 세거지인 옻골마을이다. 이 마을의 역사는 1616년(광해 8)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효종의 잠저시 사부인 대암(臺巖) 최동집(崔東)이 터를 잡으면서 집성촌을 이루게 됐다. 옻골마을이라 불리게 된 것은 주변 산과 들에 옻나무가 많아서 라는 설이 유력하다. '옻칠'자와 '시내계'자를 쓰는 '칠계'라는 다른 이름 또한 옻과 관련돼 있다.


옻골마을 입구로 들어서면 마치 세상과 단절돼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수백 년 된 느티나무와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비보(裨補)숲이 입구를 둘러싸고 있어서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나쁜 기운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숲을 조성한 것이다. 아름드리 느티나무 군락이 만들어내는 풍광은 이 마을의 자랑이다. 수려하다는 표현이 절로 나온다. 이미 사진 찍기 좋은 곳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비보숲 바로 앞에는 연못이 있다. 연못 또한 풍수지리 사상의 영향을 받아 조성됐다. 마을 뒷산 정상에 신령스러운 거북바위가 있는데 거북이 마을을 떠나지 않게 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다양한 수종의 나무를 관람하는 재미가 있다. 마을 어귀에는 400년 된 회화나무 두 그루가 마을을 지키고 서있다. 둘레가 2.9m 높이 12m에 달하는 회화나무는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됐다. 느티나무와 회화나무 외에도 주변 곳곳에는 감나무, 모과나무, 복숭아나무가 철마다 다른 옷을 갈아입고 방문객을 맞는다.

본격적인 마을 탐방에 앞서 전망대부터 가보자. 마을 오른편에 위치한 전망대에 올라 마을 전경을 찬찬히 훑어보고 있으면 잠시 시대를 거슬러오른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마을의 여러 공간 가운데 가장 눈여겨볼 곳은 백불고택(국가민속문화재 제261호)이다. 고택은 마을의 제일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최동집은 물론 조선 영조 때 학자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의 거처였던 이곳은 대구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가옥이다. ㄷ자형의 정침(正寢)과 일자형의 사랑채가 튼 口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고택의 오른쪽에는 제향 공간인 가묘와 별묘, 보본당이 마련돼 있다. 백불고택은 사랑채와 안채, 행랑채, 가·별묘, 사당까지 조선시대 양반집의 형태를 모두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또한 권위의 상징인 솟을대문이 없는 점에서도 옻골 최씨 가문의 올곧은 기풍을 엿볼 수 있다.

백불암 최흥원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남야(南野) 박손경(朴孫慶)과 함께 '영남삼로'로 추앙받던 인물이다.

그는 사회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부인동 동약'을 만들어 실행에 옮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공을 앞세우고 빈민을 구제한다'는 선공고(先公庫)·휼빈고(恤貧庫)를 두어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던 것이다. 부인동 동약은 큰 성과를 거둬 정조도 칭찬했다고 한다. 최흥원은 당대 영남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이면서 실학자의 면모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백불고택에서 나와 오른편으로 향하면 보본당이 나온다. 최흥원이 최동집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1753년 건립한 건물이다. 특히 이곳은 최흥원이 반계 류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을 교정한 장소다. 반계수록은 국가 운영과 개혁에 대한 견해를 담은 책으로 실학(實學)이란 학풍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옻골마을 오른편 개울에는 동계정이 자리잡고 있다. 최흥원의 아들인 동계(東溪) 최주진(崔周鎭)의 학문을 기려 세운 정자다. 자손들의 강학 공간으로 활용됐으며, 주변 풍광이 마을에서 가장 빼어나다. 마을 안길의 담장도 운치를 더한다. 흙다짐에 돌을 박아 만든 토석담으로, 전통가옥과 함께 전형적인 반촌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옻골마을의 담장은 국가등록문화재 제266호로 지정됐다.

글=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자문=송은석 대구문화관광 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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