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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의병 청도 '14義士' 맹활약…1919년 7차례 만세운동도 펼쳐

2020-11-25

국난시기 호국정신으로 승화된 화랑정신

임란의병 청도 14義士 맹활약…1919년 7차례 만세운동도 펼쳐
운문면 3·18독립운동기념관.

청도에서 꽃피운 화랑정신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호국정신으로 승화됐다. 임진왜란 때는 스스로 몸을 일으켜 의병을 일으키는 정신적 신념으로 굳어졌다.

1592년 4월20일, 청도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군이 북상하는 요충지였다. 청도읍성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고, 군수와 관군은 백성들을 남겨둔 채 피신해 속수무책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청도지역의 양반들이 중심이 돼 의병을 일으켜 스스로 왜적에 맞섰다.

특히 청도 밀양박씨 가문에서 배출한 14의사(義士, 박경신을 비롯한 14명)는 4월23일 운문산 아래에서 창의의 깃발을 올렸고, 나라를 지키는 중심에 섰다. 이후 이웃 고을인 경산 자인 의병장 최문병과 연합해 이듬해 명군이 합세할 때까지 왜군에 맞섰다. 1597년 화의가 결렬돼 정유재란이 일어날 때까지 의병활동은 이어졌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도 청도 군민은 스스로 일어나 불의에 저항했다. 청도에서는 3월부터 5월 초순에 걸쳐 모두 7회에 걸쳐 크고 작은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월6일 화양읍에서 문주상 등이 만세 시위를 모의하던 중 예비 검속되었고, 3월11일과 12일 매전면 장연리에서 만세 시위가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3월18일 운문면의 만세운동은 서울에서 3·1운동을 목격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지역 출신의 애국지사들이 문명학교를 중심으로 거사를 계획하고 실행해 일본 경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대표적인 독립운동이다. 청도군의 3·1운동은 근대적 민족의식을 갖춘 청년 지식인들이 독자적으로 만세 시위를 계획하거나 주도한 점이 의미를 더한다. 이들은 강직한 신념으로 불의에 저항한 화랑의 정신을 이은 젊은이들이었다.
글=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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