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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위클리포유 커버스토리] 개인택시사업자 최용호씨 생존기 2…"작년에는 석달에 고작 60만원 벌어…일상 되찾을 때까지 버틸 겁니다"

2021-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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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극복되는 그날을 기약하며 오늘도 웃으며 핸들을 잡은 최용호 사장.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경제적으로 나락에 빠졌다. 신용불량자가 됐다. 홧김에 주먹을 휘두르다 경찰서 유치장 신세도 졌다. 아내와 두 아들을 북구 관음동 부근의 원룸으로 옮기고 자신은 어머니가 살고 계시는 본가로 들어갔다. 아내와의 사이는 점점 나빠져 갔다. 그때 최 사장의 나이는 불혹이었다. "어떻게 하든 살아야 했다"고 마음 먹고 지인이 운영하는 부동산 중개사무소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어깨 너머로 부동산 공부를 했다. 이를 밑천으로 실전에 뛰어들었지만 경제적 이득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어느날 교통사고를 당했다. 두 다리가 골절되는 중상이었다. 4개월여 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 돈도 잃고 몸도 다치고 직장마저 잃었다. 정말 살기 싫었다. 이때가 2006년 초 무렵이었다.

친구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1억원 정도의 자금을 대줄 테니 조그마한 사업을 해보라고 권했다. 정말 고마웠지만 덥석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주는 게 아니라 빌려주는 거야. 이자 주고 나중에 형편 좋아지면 원금도 갚아야 된다"는 말로 친구는 최 사장의 자존심을 살려 주었다. 며칠을 고민하고 궁리했다. 그리고 고맙게 뜻을 받아들였다. 수성구 두산동에 한우 소갈빗집을 열기로 했다. 경비를 한 푼이라도 아껴 볼 심산으로 한 달여 동안 스스로 리모델링 공사를 했다. 몸은 지치고 힘들었지만 희망의 크기는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돈·직장 잃고 몸도 다친 '신불자'
친구가 손 내밀어줘 고깃집 오픈
경험 부족해 천금같은 기회 날려
어머니 돌아가시고 아내와 이혼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스스로 질책하며 매일 산 올라



문을 열었다. 문전성시까지는 아니더라도 웬만한 월급쟁이 벌이보다는 낫겠지라는 기대는 개업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무참히 깨졌다. 주변 지인과 친지들이 힘닿는데까지 도와줬지만 매달 200만원 정도 되는 월세를 내고 직원 5명 월급을 주면 남는 게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손님은 빠르게 줄어들었고 급기야 개업한 지 석 달이 지났을 때 직원 3명을 해고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됐다. "여기서 그만두면 나 자신보다 자금을 빌려 준 친구에게 면목이 없다. 버텨야 한다." 매일 아침 다짐하며 출근했다. 광고 전단지를 만들어 직접 동네 곳곳을 찾아 다니며 영업을 했다. 판매 품목을 한우 갈비살에 국한하지 않고 돼지 삼겹살도 넣었다. 영업시간대를 새벽까지 늘려봤다.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직원 한 명과 최 사장이 밤낮으로 뛰었지만 월세를 낼 수 없는 형편이 못됐다. 이를 딱하게 여긴 집주인이 월세를 20% 정도 깎아주면서 격려를 해줬다. 6개월 정도 지났다.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권리금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헐값에 가게를 넘겼다. 수천만원 적자가 났다. 돈을 빌려준 친구에겐 첫 달에만 이자를 줬다. 어머니가 사는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고 그 돈으로 친구가 빌려준 돈을 갚았다. "이자를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 친구야." 경험 부족은 소중하게 얻은 기회를 실패로 매듭지어 버렸다.

◆다시 한번 일어선 최 사장

아내와 헤어졌다. 아이들은 아내가 맡기로 했다.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오롯이 혼자가 됐다.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두 다리가 아팠지만 개의치 않았다. 40여 년의 인생을 돌아봤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를 찾아 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자문해봤지만 몸마저 성치 않은 신용불량자의 미래는 가늠할 수 없었다. 최 사장은 그때를 돌이켜본다. "대구·경북에 있는 웬만한 산을 다 다녔다. 발을 땅에 딛지 못할 정도로 다리가 아팠지만 참았다. 오르고 또 올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아마도 그런 식으로 나를 질책했던 것 같다. 지탄받는 사업을 한 벌(罰)인가라고 생각도 했지만 갈빗집을 할 때는 정말 열심히 했는데 도대체 왜 나에게 이렇게 가혹한 일이 일어나지.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4년이 흘렸다. 지인들로부터 약간의 경제적인 도움을 받았지만 살아남은 게 신기할 정도로 밑바닥 생활을 견뎠다. 불현듯 "이렇게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몰려왔다. 하지만 이 올가미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어느날 세 살 터울의 친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주 5일 근무하는 일용 임시직인데 해볼 생각이 있냐. 월급은 적다"고.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더운 밥 찬밥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일을 다시금 시작했다. 조금씩 평상심을 찾아갔다. 몸도 많이 좋아졌다. 가끔씩 사는 행복도 느꼈다. 5년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일용직 나가며 밑바닥 생활 견뎌
법인택시기사 3년 만에 빚 청산
개인사업자 내고 '내 집 마련 꿈'
갑자기 터진 전염병에 다시 절망
여기까지 어떻게 버텨왔는데…
아들 장가 갈 무렵엔 좋아질까요?



우리나라 나이로 '지천명'이 됐던 2015년 봄,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이 일을 얼마 동안 더 할 수 있을까. 잘 버텨봐야 7~8년 정도 아닐까. 그다음엔 어떻게 살지?" 덜컹 겁이 났다. 그때 최 사장은 여전히 신용불량자였고 사채 채무자였다. 매달 번 돈 가운데 상당액을 떼내 빚을 갚아야 했다. 예전처럼 주변의 도움을 받는 처지는 아니지만 모아둔 돈은 거의 없었다. 내가 이 나이에 잘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지금보다 좀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없을까.

몸 고생한 만큼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법인택시 기사다. 다른 사람과 달리 교대하지 않고 종일 운전하는 도급제를 선택했다. 하루 번 돈 가운데 사납금 12만원을 제한 뒤 모두 가져가고 여기다 월급으로 100만원을 받는 것이 조건이었다. 한 달에 한 번도 쉬지 않았다. 하루에 4시간 이상 잠을 자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좋아하던 술은 거의 먹지 않았다. 친구를 만난 횟수는 1년 동안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이었다. 소비 패턴도 바꿨다. 웬만하면 돈을 쓰지 않았다. 계절마다 옷 한 벌이면 충분했다. 꼭 3년이 지났다. 3천500만원가량 됐던 빚을 모두 갚았다. 십수 년 만에 신용을 회복했다. 법인택시를 계속하기보다 자영업을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개인택시 면허를 샀다. 면허값에다 차량 구입비, 세금 등등 모두 9천200만원이 들었다. 단 1원의 빚도 내지 않았다. 법인택시를 몰면서 모으고 모은 돈으로 빚도 갚고 개인택시 면허도 샀다. 이제 어엿한 개인사업자가 됐다. 최 사장 나이 오십셋이었던 2018년이었다. 떳떳한 아버지가 머지않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최 사장은 다시 당시를 떠올린다. "법인택시 3년 하고 나니까 체력이 고갈되더라. 그런데 돈이 모였더라. 나한테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는데 세상은 저의 피눈물나는 노력을 외면하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부제로 쉬는 날을 제외하고는 매일 오전 5시30분쯤에 일어났다. 서둘러 채비를 갖추고 일터로 갔다. 거의 매일 오후 8시쯤 집으로 돌아왔다. 점심식사 시간을 빼고 13시간 일했다. 고객은 늘 있었다. 고객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게 너무 즐거웠다. 이때부터 주로 서재·성서·금호·다사 지역을 중심으로 운행했다. 당시 한 달 수입은 평균 430만원 정도였다. 스무 날 일한 대가였다. 차량 가스비 50만원, 차 보험료 25만원, 차량 유지비 15만원가량을 제하면 340만원 정도가 순수입이었다. 이 정도 수입을 10년 정도 유지해 알뜰히 모은다면 도심을 약간 벗어난 지역에다 대출을 끼고 작지만 내 집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가 몰려왔다. 행복해지는 꿈을 다시 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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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북구 금호지구 도롯가. 손님이 없을 때 정차해서 잠시 쉬어갈 곳이 마땅치 않아 빈차로 돌아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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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호 사장이 점심 식사를 위해 주문한 4천500원짜리 정식. 이날 오전에 2만1천원을 벌었는데 식사값을 빼니 1만6천500원이 남았다.

◆코로나19가 빼앗아간 꿈

2020년 1월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신종 전염병이 한국에 상륙, 감염자가 발생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다른 전염병처럼 곧 잠잠해지겠지"라는 최 사장의 바람은 그해 2월18일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대구 첫 환자가 발생한 그날 이후 10명, 23명, 50명, 70명, 141명. 환자 수는 급증했다. 52일 동안 무려 대구에서만 6천800명 넘게 발생했다. 병원 응급실은 폐쇄됐다. 병상은 부족했다. 넘쳐나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생활치료시설이 가동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도시는 말 그대로 '셧다운'이었다.

최 사장은 코로나19가 대구에서 창궐하기 시작할 무렵 며칠 동안 운행을 시도해봤다. 길거리 가게 문은 아예 닫혀 있었다. 거리에 나다니는 사람과 차량은 없었다. 하루 종일 단 한 명의 고객을 태워보지 못한 날도 있었다. 공공기관과 언론은 코로나19에 걸리면 곧바로 죽을 것처럼 공포감을 조성했다. 덜컹 겁이 났다. "나도 이 상황에서 피신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때부터 일체 집 밖을 나오지 않았다. 4월12일 대구에서 코로나19 환자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뉴스를 듣고서야 운행을 재개했다. 그러나 여전히 고객은 없었다. 하루에 3만원을 벌지 못할 때도 적지 않았다. 코로나19 발발 이후 석 달 동안 최 사장이 번 돈은 60만원이었다. 모아놓았던 돈으로 버텼다. 곧 끝날 것 같았던 신환(新患)의 공포는 이어져만 갔고 최 사장의 꿈은 또다시 현실과 멀어지게 됐다.

지난해 하반기에 들면서 수입이 조금씩 회복됐지만 아직도 코로나19 이전의 절반 수준에 머물고 있다. 최 사장은 자칫 정부에서 주는 재난지원금도 받지 못할 상황이다. 세금 계산을 대신해 주는 대행업체에서 지난해 수입을 잘못 정리한 탓이다. 2년 전쯤 대구에 상륙한 카카오 택시의 영향도 최 사장을 힘들게 했다. 최근 들어 상당수 고객이 이쪽으로 빠져 나갔다. 개인적으로 가입하고 싶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그래도 또다시 주저앉을 수는 없다. 코로나19가 만든 악조건만 조금씩 해결되면 언제라도 일어설 준비가 돼 있다.

최 사장의 요즘 바람은 단 하나다. 하루빨리 코로나19의 공포가 사라지는 것. 그래서 완전하지는 않겠지만 옛날로 돌아가는 것. "돌고돌아 여기까지 왔는데 코로나19가 이렇게 오랜 시간 나의 삶을 힘들게 할 줄은 몰랐어요. 산전수전 다 겪은 것 같은데 아직 아닌가 보네요. 올 연말쯤 큰아들이 장가 갈 예정인데요, 설마 그때는 사정이 좀 나아지겠죠. 못난 아버지지만 그때만큼은 꼭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유선태기자 youst@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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