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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포유 커버스토리] 개인택시사업자 최용호씨 생존기 1…산전수전 다음이 코로나일 줄이야…

2021-04-16

용접공→과일장수→당구장 사장→고리대금업자→신용불량자→부동산중개사무소 직원→갈빗집 사장→일용직 근로자→택시운전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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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택시 사업자로 제2의 인생을 꿈꿔왔던 최용호 사장. 15개월째 이어지는 코로나19로 인해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최용호(55) 사장은 개인택시 사업자다. 일주일에 다섯 번을 오전 6시쯤 일어난다. 씻고 간단한 식사를 마친 뒤 '애마' 소나타를 타고 집에서 8.7㎞ 정도 떨어진 대구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 다사읍행정복지센터 서재출장소 부근으로 간다. 이곳 주변과 성서·다사·금호 지역을 주로 운행한다. 지난 13일 아침, 여느 때와 같이 서재리로 갔다. 오가는 차량이 거의 없다. 운전석 창문을 열고 싱그러운 봄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지난해 2월 대구에서 코로나19 첫 확진자가 발생한 이후 출근길 고객은 거의 없다. 15개월째다. 그래도 최 사장은 간다. 오늘 아침도 어제와 다르지 않다. 행정복지센터 서재출장소 부근에서 벌써 한 시간째 기다리고 있지만 택시를 타려는 사람이 없다. 차안에서 손님을 기다려며 음악을 듣고 있는데 누군가가 휴대폰으로 자신의 차량을 촬영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창문을 열고 주변을 살폈지만 누군가는 어느새 그곳을 떠나고 없었다. 불길하다. 불법 주정차 차량을 신고하는 시민인 것 같다. 황급히 차를 몰아 다른 곳으로 갔다. 요즘 들어 도롯가는 말할 것도 없고 주택가 이면도로에도 정차해서 잠시 쉬어가기가 쉽지 않다. 휴대폰으로 찍어 관할 당국에 신고하는 사람과 CCTV 때문이다. 지난달에만 세 번이나 주정차 위반으로 단속돼 12만원의 과태료를 냈다. 오전 8시쯤 고객 한 분을 다사까지 모셔 드렸다. 그곳에서 성서 쪽으로 나오다 한 분을 더 태웠다. 달서구 죽전동 죽전네거리로 갔다. 죽전동에서 서구 평리동 서구청 앞까지 가는 손님 두 분을 태웠다. "요즘 벌이는 좀 괜찮습니까." 손님 한 분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2시간 반 동안 네 번째 손님 태웠습니다." 손님들을 목적지에 모셔다 드린 뒤 낮 12시까지 빈차로 성서·서재 등지를 돌아다녔다. 서구 원대동에 있는 단골 기사식당으로 갔다. 예닐곱 명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모두들 지쳐 보였다. 4천500원짜리 정식을 주문했다. 안면 있는 기사와 수인사를 하고 넌지시 물어봤다. "오전에 괜찮았어?" 돌아온 답은 손사래였다. 벌써 1년 훨씬 넘어 반복되는 현상이다. 식사를 마치고 기사식당에서 공짜로 제공해 주는 믹스 커피를 손에 들고 애마에 올라 미터기를 찍어봤다. 2만1천원을 벌었다. 식사값을 빼니 1만6천500원이 남았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이건 아닌데. 정말 뾰족한 방법이 없네" 혼잣말을 했다. "오후에는 좀 나아지겠지" 자위하고 다시 서재 방향으로 갔다. 춘곤증인가. 졸음이 몰려왔다. 운전석 자리를 뒤로 젖힌 뒤 눈을 붙였다.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고졸의 용접공, 셋방서 신혼살림
자식 생기니 '경제적 안정' 갈구
과일·채소장사하다 당구장 오픈
손님들의 '불법 하우스' 눈 감고
고리대금업 하다 전세금도 날려
돈 욕심에 한순간 꼬여버린 인생
이 악물고 다시 일어선 이야기



◆손대는 사업마다 망하는 '마이너스 손'

두 곳의 학교를 6년이나 다닌 끝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한마디로 말해 공부에 흥미가 없었다. 군 전역 후 25세 무렵 누나가 사는 울산으로 갔다. 용접기술을 배웠다. 3년 정도 그곳에서 생활하다 대구로 다시 돌아왔다. 울산에서 만난 아가씨와 결혼했다. 대구시 동구 반야월에서 사글세로 방 한 칸을 얻어 신접살림을 차렸다. 용접기술로 벌어들이는 돈으로 부자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서른 즈음 큰아들이 태어나자 모아둔 돈으로 화물차를 구입해 반야월에서 과일·채소장사를 시작했다. 매천시장 등에서 구입한 제철 과일과 채소를 팔았다. 월급쟁이 때보다 수입이 좋았다. 과일가게를 냈다. 패착이었다. 화물차로 장사할 때 보다 수입이 못했다. 월세를 제대로 내지 못할 정도였다. 얼마 가지 못해 가게 문을 닫았다.

법인택시 회사에 취업했다. 2년 정도 다녔다. 경제적 안정에 대한 절박함이 더 세게 조여왔다. 본가와 처가의 도움을 조금 받아 서대구산단 부근에 당구장을 열었다. 이상하게 소문이 났다. 언젠가부터 당구 치러 오는 손님보다 당구장 한편에 마련된 방에서 도박하러 오는 사람이 더 많았다. 뜻하지 않게 속칭 '하우스'가 돼 버렸다. 불법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벌이가 쏠쏠했다. 아내가 알면 걱정할까봐 비밀로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돈에 욕심이 났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눈 한 번만 더 질끈 감자"고 마음 먹고 친구의 돈을 빌려 고리대금업에 손을 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못할 짓이었는데 그때는 아내와 두 아들에게 좀 더 나은 경제적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게 무엇보다 먼저였다. 호시절은 길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일이 터졌다. 일은 꼬여만 갔다. 그렇게 2~3년이 흘렸다. 아파트 전세금을 빼내 문제를 해결해 보려 했지만 끝이 보이지 않았다. 피눈물을 흘리며 업을 정리했다.

유선태기자 youst@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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