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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인재향 영양 .1] 옥천 조덕린 - 영남유생의 정신적 지주…붕당 폐단 상소 '십조소'로 질곡의 노후

2021-06-29

■ 시리즈를 시작하며=영양은 천혜의 자연과 함께 유서 깊은 역사가 공존하는 고장이다. 특히 역사의 중심에 선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인재향(人材鄕)으로 손꼽힌다. 여중군자 장계향 과 서석지를 조성한 석문 정영방을 비롯해 국난극복을 위해 온 몸을 던진 오시준·오수눌 부자, 오극성·오윤성 형제, 항일의병장 벽산 김도현,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 불꽃처럼 살다간 젊은 독립투사 엄순봉, 천재화가 금경연, 청록파 시인 조지훈, 현대시의 거목 시인 오일도 등 한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인재들의 고장이 바로 영양이다. 그들의 올곧은 정신문화는 영양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공유하고 있는 소중한 유산이자 '미래 영양'을 이끌어갈 원동력이다. 영남일보는 오늘부터 영양이 낳은 인재와 그들의 이야기를 재조명하는 '인재향 영양'시리즈를 연재한다. 1편에서는 영남 남인의 상징 옥천 조덕린에 대해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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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종택은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에 있는 옥천 조덕린의 집으로 17세기 말의 전형적인 양반주택이다. 살림채인 정침, 글 읽는 별당인 초당, 가묘인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양 일월산 아래 호리병 같은 골짜기에 한양조씨 집성촌인 주실마을이 있다. 마을 뒤로는 일월산에서 흘러온 세 개의 완만한 봉우리가 물 위에 뜬 연꽃 같은 부용봉(芙蓉峯)으로 펼쳐지고, 마을 앞으로는 갈미봉·문필봉·연적봉·흥림산·독산이 서에서 동으로 이어진다. 마을 중앙으로는 장군천이 흘러 양편으로 넉넉한 땅을 이루었다. 문필봉을 독대하고 장군천을 내다보는 마을의 중앙부 가장 안쪽, 일월산의 두 번째 봉우리에서 지맥 하나가 내려오다가 중간쯤에서 남쪽으로 꺾인 구릉지에 옥천종택이 자리한다. 옥천(玉川) 조덕린(趙德 )의 집이다. 그는 영조대 초반 영남의 사론을 대표하던 인물이었다. 자신의 안위조차 돌보지 않고 직언을 서슴치 않았던 영남 남인 질곡의 상징이다.

#1. 옥천 조덕린

주실에 한양조씨가 터를 잡은 것은 인조 8년인 1630년경이다. 입향조는 호은(壺隱) 조전(趙佺)이다. 옥천 조덕린은 호은의 증손자로 1658년 주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충의위(忠義衛) 조군(趙 ), 어머니는 풍산류씨 류세장(柳世長)의 딸이다.

옥천은 7세 때부터 숙부인 조병(趙 )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하회 외가에도 드나들며 외조부 류세장 등에게 수학했다. 장성해서는 영남 남인의 영수였던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퇴계학의 학맥을 잇게 된다.

옥천은 1677년 진사시에 합격했고 숙종 17년인 1691년에 문과에 합격해 승문원 정자(正字)에 임명됐다. 당시 그는 '근년에 기주관(記注官) 중 많은 인재를 보았으나 기사(記事)가 유창하고 체재(體裁)를 구비한 인재로 조덕린 같은 사람이 없었다'는 평을 들었다. 이후 제원역 찰방, 세자시강원 설서(說書)를 지내다가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귀향했다. 그해 겨울 예조좌랑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숙종 34년인 1708년 옥천은 강원도 도사에 제수되어 다시 관직에 나갔다. 당시 관동지방은 매년 농사를 짓는 정전(正田)과 돌려가면서 농사를 짓는 속전(續田)을 구분하고 정전에만 세금을 부과하고 있었다. 그런데 감사 송정규가 모든 토지를 정전으로 간주하고 일률적으로 세금을 부과하는 것에 대해 옥천은 시정을 건의한다. 감사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옥천은 사임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영조대 초반 영남사론의 대표인물
직언서슴지 않고 상소 수없이 올려
반대파 미움 받아 관직·귀향 반복
고향선 학문 몰두하며 제자들 양성

십조소 올렸다가 일흔나이에 유배
대의 위해 목숨도 돌보지 않은 충신
'영원토록 우러러 볼 어른'이라 칭송



이후 고산현감에 제수되었지만 '백수(白首)로 현감의 녹을 먹는 것이 태백산중의 한 끼 밥만 같지 못하다'며 부임하지 않았다. 숙종 연간 그가 올린 상소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당시는 서인과 남인의 공존을 바탕으로 한 대립이 계속되던 시절이었고 그는 관직생활과 귀향을 거듭했다.

옥천종택 대문이 높다. 구릉지에 지어져 마을에서도 전망 좋은 집이다. 종택은 17세기 말의 전형적인 양반주택으로 살림채인 정침, 글 읽는 별당인 초당, 가묘인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교 없는 살림집이 검소하고 마루와 석축 아래 디딤돌이 예쁘다.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서 지은 초당은 조덕린의 장자인 조희당(趙喜堂)이 부모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검소하게 지었다고 한다. 사당은 1790년에 건립된 3칸 건물로 정침의 우측 뒤편에 자리한다.

종택의 오른편으로 돌계단을 오르면 창주정사(滄洲精舍)에 닿는다. 옥천이 문생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창주는 그의 별호다. 창주정사에 대한 역사는 기록마다 일부 차이가 있다. 이건기에 따르면 옥천이 51세 되던 1708년에 태백산 노고봉 기슭에 세운 것이라 한다. 이후 1720년에 청기면 임산리(霖山里)로 옮겨 문생들을 가르치며 만년을 보낼 곳으로 삼았다. 150여 년이 흐르면서 정사가 소실되자 사림에서 강당을 재건해 임산서당(霖山書堂)이라 칭하고 유지를 받들어 강학을 이어왔다고 한다. 현재의 자리로 이건한 것은 1990년이다.

옥천선생문집에는 옥천이 73세가 되던 1730년에 태백산 노고봉 기슭에 세웠으며, 그의 사후 후손인 마암 조진도가 사미정 인근으로 이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정사가 퇴락하자 19세기 중반 사림에 의해 청기면 정족리로 이건되었으며, 화재로 인해 소실되자 중건하면서 정사의 명칭을 임산서당으로 개칭했다. 서당이 폐쇄되자 1990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했으며, 명칭 또한 임산서당에서 창주정사로 다시 환원했다.

창주정사 현판은 선생의 유묵을 집자해 새긴 것이다. 마루에는 임산서당과 창주재(滄洲齋) 편액이 걸려 있다.

#2. 영남 유생들의 정신적 지주

1725년 영조가 등극했다. 그해 옥천은 2월부터 10월까지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등에 끊임없이 제수된다. 당시 대신은 옥천을 추천하면서 '40년을 산림에서 독서하여 문장과 경학이 당세 제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옥천은 자신의 어리석음과 병을 핑계로 관직을 사양하는 상소를 잇따라 올리며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10월 20일 사간직을 사양하면서 붕당 간 대립의 폐단을 논하는 10가지 의견을 상소한다. 이른바 '십조소(十條疏)' 또는 정명론(正明論)이다.

'어리석은 말씀을 드리니, 성학(聖學)을 밝게 닦아서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며, 실덕(實德)을 닦아서 하늘에 응답하시는 것이며, 적임자를 정선(精選)하여 정사를 세우는 것이며, 백성을 보호하여 근본을 튼튼히 하는 것이며, 재용(財用)을 절약하여 비용을 줄이는 것이며, 군사(軍事)의 내실을 검토하여 뒷날을 대비하는 것이며, 형옥을 신중히 하여 형벌을 너그러이 하는 것이며, 기강을 진작시켜서 풍속을 권장하는 것이며, 공도(公道)를 넓혀서 사사로움을 없애는 것이며, 이름과 실질을 바르게 하여 나라의 근본을 세우는 것입니다. 무릇 이 열 가지는 모두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말이며 시대의 절박한 폐단에 대한 것인데, 신이 곧 감히 일에 관련된 의견을 조목별로 만들었으니 삼가 성상께서는 살펴 주소서.'

상소에는 학문 수양, 인재 선발, 백성 보위에 최선을 다하고, 사심이 아닌 공공의 도리를 실현하라는 등의 열 가지 건의가 담겨 있었다. 그리 새로울 것 없는 내용이지만 이 상소문으로 인해 옥천은 일흔이 다 된 나이에 함경북도 종성(鍾城)으로 유배된다. 치열한 정쟁의 살얼음판 위에서 우여곡절 끝에 이제 막 왕위에 오른 영조에게 '정명'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정명'은 '이름을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유가에서는 보편적인 사상이지만 현실 권력을 상대로 했을 때는 도전으로 읽힐 수 있다. 왕에게 왕다워야 함을 강조하는 것은 자칫 정통성을 흔드는 의도로 비칠 여지가 있었고 반대파 인사들이 집요하게 문제 삼은 것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이로 인해 옥천은 영남 유생들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게 된다. 유배지로 떠나는 그에게 도성과 영남의 사대부들은 앞 다투어 돈과 베를 내어 노자를 보탰고 '영원토록 우러러 볼 어른'이라 칭송하였다. 그는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이 집권하면서 유배에서 풀려났다.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3. '근심 없이 청산에 이제 다시 왔구나'

1728년 3월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옥천은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로 의병을 결집해 활약했다. 난이 평정되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된 그는 경연(經筵)에 참석하는 등 잠시 관직 생활을 하지만 곧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학문에 몰두하며 원근에서 몰려든 제자들을 길렀다.

영조 12년인 1736년 옥천은 서원의 무분별한 건립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에 다시 과거의 '정명론' 상소가 거론되었고 결국 옥천은 노론의 탄핵을 받고 체포된다. 왕은 '조덕린은 보통 죄수와 다르니 수갑을 채우지 말고 가택을 수색하지 말 것이며, 압송 도중에도 노인의 기력을 손상하게 하지 말라'고 했다. 심문이 끝나자 대신 김대로는 '정인군자(正人君子)를 억울하게 해칠 뻔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정명론'이 그의 운명을 흔든다.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이 사직소를 올리며 스승 갈암 이현일의 원통함을 호소하였는데, 노론 측에서는 이 기회를 타 다시 옥천의 '정명론'를 거론한 것이다. 결국 왕은 옥천을 제주도에 위리안치하라는 명을 내린다.

유배지로 향하던 길, 그는 강진에서 세상을 떠났다. 1737년 여름이었고, 그의 나이 80세였다. 그는 '생사에는 한도가 있으니 천명을 어길 수는 없다. 목욕은 깨끗하게 하고 염하고 묶는 것은 반드시 단조롭게 한 후 엷은 판자와 종이상여를 만들어 말에 실어서 돌아가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부고가 주실에 전해지기 전, 족제(族弟)인 주강(株江) 조시광(趙是光)의 장남 조서규(趙瑞圭)가 옥천의 꿈을 꾸었다고 한다. 꿈속에서 옥천은 선대의 묘 아래에 있는 상원리 비리재 재사를 배회하며 말했다 한다. '근심 없이 청산에 이제 다시 왔구나.'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영양군지, 옥천선생문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한국국학진흥원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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