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토중 죽는 관리 많아지자
울릉 순찰 회피하다 파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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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음력 3월1일에 울릉도 개척민들의 정신을 기리고 지역의 무사 평안을 기원하기위해 열리는 성하신당 기원제의 모습. |
세종 7년(1425년) 안무사 김인우의 2차 수토 때 수행원 46명이 실종되는 큰 사고가 발생했는데 그중 36명은 익사하고 10명은 표류하다 일본 대마도를 거쳐 조선으로 돌아왔다. 숙종 19년(1693년) 울릉도에서 안용복과 일본 어부들의 충돌로 조선과 일본 사이 외교분쟁이 발생해 이 사건 이후로 삼척 첨사 장한상이 수토관이 되어 이듬해 가을에 20일 동안 울릉도를 수토하면서 독도까지 돌아보고 왔다는 사실이 특이하다. 숙종 21년(1695년) 삼척 첨사 이준명이 울릉도 순찰을 회피한 이유로 관직에서 파면당했는데 이는 울릉도 수토 중 사망한 관리가 많아 이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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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수토역사전시관의 '신묘명각석문'. |
울릉군 서면 학포마을 암벽에는 검찰사 이규원 외 다수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임오명 각석문'이 남아 있다. 조선 고종 19년(1882년) 임오년의 기록으로, 울릉도의 근세 흐름을 금석문으로 입증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고종 19년에 검찰사 이규원은 15일 동안 울릉도 전체를 수토하고 그 보고서를 조정에 제출하면서 울릉도 쇄환정책(刷還政策)의 마침표를 찍었다. 본격적으로 울릉도를 개척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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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군 서면 학포리 암벽에 새겨진 '임오명각석문' |
조선 초기 태종은 안무사 김인우를 보내 울릉도 주민들을 육지로 이주시키게 했다. 김인우는 섬사람들을 모두 모아 다시 육지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풍랑이 심해 돌아가지 못하던 중, 두 명의 남녀를 두고 가라는 꿈을 꾼 뒤 그대로 했더니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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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목숨을 아끼지 않으면서 국가의 정책을 수행한 수토관들의 애환과 고통이 담겨 있는 귀중한 자료들을 간략하게 소개했다. 울릉도·독도의 개척사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울릉도에서 눈으로 직접 체험하며 울릉도의 수토 역사를 확인해 보는 것도 울릉도·독도 여행의 또 다른 묘미다.
임만주〈울릉군 문화관광해설사〉
정용태기자 jyt@yeongnam.com

정용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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