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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도청 新도시 기행 .7] 힐링명소-안동 예끼마을과 도산서원…담벼락엔 벽화·빈집은 갤러리로…예술과 끼 넘치는 호반마을

2021-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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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성수상길은 안동 도산면 서부리에서 동부리까지 안동호반에 놓인 약 1㎞ 길이의 부교로 선성현길의 백미다. 비교적 넉넉한 너비에 물결이 잔잔해 안동의 대표적인 힐링명소로 자리 잡았다.

호숫가 구릉진 땅에 자리한 마을이다. 집들은 넓고 넓은 호수를 바라보며 차곡차곡 앉아있다. 저 물밑에 마을 사람들의 고향집이 있고, 공부하던 학교와 뛰어놀던 골목길이 있다.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골목길을 올라오신다. 젊은 연인이 호수로 향해 뻗은 골목길을 천천히 내려간다. 그네들이 스치는 담벼락에는 꽃이 피어 있고, 아이들이 숨바꼭질을 하고, 어린 소녀가 더 어린 동생을 업고, 황금빛 들판이 펼쳐져 있다. 할머니의 둥근 등 위로 물에 잠긴 옛 이야기가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젊은 연인들의 걸음이 오래된 이야기에 젖는다. 이곳은 안동 도산면 서부리, 오늘날 사람들은 '예(藝)끼마을'이라 부른다.

안동댐건설로 주민들 흩어졌지만
차마 고향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
산언덕에 새로운 터전 마련 정착

도시화 가속화로 청년들 떠나자
'이야기있는 마을'로 활기 되찾아
공방·카페·선성현 옛관아도 복원

물에 잠긴 고향집터 짐작해보며
호수 위 선성수상길을 걷다보면
선비순례길·도산서원과 이어져
퇴계 제자·선비들이 서원 세워
'도산서원' 현판은 한석봉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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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끼는 도산면 서부리의 새로운 이름으로 '예술의 끼'라는 의미다. 3대 문화권 사업으로 빈집들은 갤러리와 공방, 식당, 카페 등으로 탈바꿈했고, 골목길은 트릭아트와 벽화로 채워졌다.

#1. 예끼마을

도산면 서부리는 조선시대 예안군(禮安郡) 읍내면에 속해 있었다. '택리지'에 예안은 '태백산과 소백산 아래 신령이 서린 복된 땅'이라 했다. 예안은 안동의 북동쪽 낙동강 상류에 자리 잡은 기름진 분지였고 그 중심이 바로 서부리였다. 뒤로는 선성산(宣城山)이 자리하고 앞으로는 낙동강이 흐르는 풍요롭고 살기 좋은 마을이었다. 그러다 1973년 안동댐을 만들면서 마을 일부가 물에 잠겼고 1974년에는 도산면에 편입되었다.

대부분의 예안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차마 떠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옛 마을의 산언덕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했다. 한 때 마을은 성했다. 400여 가구가 복작거렸고 대구를 오가는 직행 버스도 있었다. 그러나 도시화가 가속화되면서 젊은이들은 떠나고 빈집은 늘어났다. 마을은 조용해졌다.

2011년 국책사업인 3대 문화권사업이 추진되었다. '역사와 예술로 마을을 살려보자'는 데에 주민들의 의지와 기관의 뜻이 모아졌다. 그렇게 2014년 '도산 서부리 이야기가 있는 마을 조성사업'이 시작되었다. 2018년 사업이 마무리될 즈음 마을에는 '예끼'라는 새로운 이름이 생겼다. '예술의 끼'라는 의미다. 우체국은 전시공간과 도자공방으로 변했다. 옛 마을회관에는 작가가 상주하며 작업을 한다. 빈집들은 크고 작은 갤러리와 공방, 식당, 카페 등이 되었고 골목길은 트릭아트와 벽화로 채워져 있다.

거리에는 '예안교회' '예안 이발관' '농협 예안지점' 등 예안이라는 명칭을 단 간판들이 많다. 지금은 도산면이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예안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하다고 한다. 그에 못지않게 자주 보이는 이름이 '선성(宣城)'이다. 선성은 예안의 옛 이름으로 고려 태조 왕건 때의 명칭이었다. 마을 중턱에 있는 한옥의 솟을대문에 '선성현아문(宣城縣衙門)' 현판이 걸려 있다. 선성현 관아의 대문이라는 뜻이다. 대문 안의 두 건물은 옛날 예안면사무소와 부속 건물을 옮겨온 것이다. 옛 건물은 갤러리 근민당(近民堂)과 한옥카페 장부당(掌簿堂)으로 새롭게 변모했다.

마을 오른편 안동호가 훤히 내다보이는 자리에 선성현의 옛 관아가 복원되어 있다. '선성현 문화단지'다. 객사, 동헌, 관청 등과 함께 한옥체험관과 역사관이 조성되어 있다. 객사의 한쪽 귀퉁이에 쌍벽루(雙碧樓)가 있다. 선성읍지에 '부진(浮津) 언덕 위에 있다'고 나오는 누각인데 현재의 자리가 과연 '부진'이다. 저 아래 호수 위로 난 길이 보인다. '선성 수상길'이다.

물 위의 길은 부교(浮橋)다. 폭이 비교적 넉넉해 걸음에 안정감이 있다. 꿀렁꿀렁 물결이 길을 어르는 소리가 꿈결 같다. 길의 가운데에 풍금과 책걸상이 놓여 있다. 옛 예안초등학교가 있던 자리다. 더 오래전에는 예안 객사가 있었다. 학교는 1909년 4월 이인화(李仁和)라는 이가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후진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재를 들여 설립했다고 한다. 학교는 안동댐 건설 때 현재의 한국국학진흥원 옆에 자리 잡았지만 학생이 없어 폐교됐다.

풍금 앞에서 뒤돌아보면 나지막하고 가파른 산이 길게 엎드려 있다. 예안의 진산이었던 선성산이다. 산에는 후삼국 시대의 산성 터가 남아 있다. 수상길이 선성산을 휘돌면 물에 젖은 산과 산 사이로 멀리 기와지붕들의 작은 무리가 보인다. 예안향교다. 향교에서는 지금도 2월과 8월에 제향하고 있다고 한다.

물 위의 길이 뭍에 닿는다. 이곳은 동부리다. 선성 수상길이 다시 뭍으로 올라서는 곳에는 동부리의 안동호반 자연휴양림이 있다. 길은 동부리의 산사면을 따라 다시 멀리 이어진다. 이 길은 2017년에 만들어진 '안동선비순례길'의 1코스인 '선성현길'에 속해 있다. '안동선비순례길'은 퇴계의 귀향길에 뿌리를 두고 있다. 퇴계선생은 1569년 음력 3월 선조 임금에게 하직인사를 고하고 서울 봉은사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안동의 도산서당까지 320㎞를 12일간 걸어서 귀향했다. 그의 걸음을 따라 9개 코스가 91.3㎞로 이어져 있다. 예끼마을에서 도산서원까지는 10분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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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과 고을 선비들이 세운 도산서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당시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서원 가운데 하나다.

#2. 도산서원

도산서원은 눈앞에 정성스러운 정원을 펼쳐 놓고는 꽃들 사이로, 나무들 너머로 호수를 바라본다. 도산(陶山)은 옛날 옹기 굽는 가마가 있었다고 해서 퇴계가 지은 이름이라 한다. 퇴계는 1557년 이곳에 터를 마련하고는 4년에 걸쳐 서당을 지었다. 그리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했다. 옹기장이 늙은이, 한껏 자신을 낮춘 이름이다. 도공이 그릇을 빚듯 자신과 후학들을 빚고 싶었을까.

도산서당은 3칸 규모의 건물이다. 서쪽 1칸은 골방이 딸린 부엌이고, 중앙의 온돌방 1칸은 퇴계가 거처하던 완락재(玩樂齋), 동쪽의 대청 1칸은 마루로 된 암서헌(巖棲軒)이다. 건물은 작고, 건물 벽에 난 문은 더욱 작다. 당시에 있었던 것은 학생들의 기숙사인 농운정사( 雲精舍)와 제자들이 힘을 합해 세운 역락서재(亦樂書齋) 정도다.

서당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퇴계는 연못에 연꽃을 심고 정우당(淨友塘)이라 이름 붙였다. 그 동쪽에 몽천(蒙泉)이란 샘을 만들었다. 샘 위의 산기슭에는 단을 쌓아 매화와 대나무, 소나무, 국화를 심고 절우사(節友社)라 하였다. 작은 서당에서 이 작은 화단을 가꾸며 기거한 시간이 7년이었다. 퇴계는 20세 전후부터 평생을 병치레하였는데 1570년 고희를 즈음하여 병이 악화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평소 사랑하던 매화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케 한 후 일으켜 달라 하고는 그대로 단정히 앉은 자세로 세상을 떠났다.

퇴계가 세상을 떠나고 삼년상을 마친 뒤, 그의 제자들과 온 고을 선비들에 의해 서원이 세워졌다. 1575년 8월 낙성과 함께 선조로부터 사액을 받았고, 1576년 2월에 사당을 준공하여 퇴계 선생의 신위를 모셨다.

서원 경역 내에는 중심 강당인 전교당과 동재, 서재, 서고인 광명실, 서원 관리인의 살림집인 두 채의 고직사, 목판본을 보관하던 장판각, 선생의 위패를 모셔놓은 상덕사 등이 자리한다. 전교당에 걸린 '도산서원' 현판 글씨는 한석봉(韓石峯)이 임금 앞에서 쓴 것이라 한다.

서원으로 출입하는 정문은 진도문(進道門)이다. 문을 통과해 오르다 돌아서면 낙동강 물줄기를 가둔 안동호 일대가 넓게 펼쳐진다. 호수 가운데 섬 하나가 떠있다. 시사단(試士壇)이다. 정조대왕은 퇴계를 매우 흠모했다고 한다. 그래서 1792년에 그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특별 과거인 '도산별과'를 열었는데 응시자가 7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원래 자리는 송림이었다. 그러나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었고, 송림이 있던 자리에 축대를 쌓고 자리를 표시해 둔 것이다. 도산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당시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서원 가운데 하나다.

서당의 틈 많은 마루에 앉아 세계를 휘둘러본다. 안동호 거대한 물이 산 아래를 쓰다듬으며 둥글게 굽어져 흐른다. 서원 앞 너른 땅은 왕버들의 초록빛 그림자로 채색되었고,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흔들리고 햇살이 쏟아지고 물 내가 인중을 적신다. 저 물길을 거슬러 한 굽이를 돌면 퇴계종택과 퇴계의 묘소가 자리한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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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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