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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 아픈 역사의 현장] (4) 미군폭격기 모심듯 융단폭격...매년 음력 7월3일 밤이면 집집마다 불 켜는 구미 형곡동

2021-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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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6·25 전쟁 형곡동 폭격 희생자 위령탑을 건립한 주민·유족·기관단체장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구미시 제공

경북 구미시 형곡동은 1951년부터 매년 음력 7월3일에는 한밤중에도 집집이 불이 환하게 켜진다. 마을 주민 대부분이 같은 날에 제사를 지내기 때문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전쟁에도 안전하다고 소문이 난 형곡동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8월16일(음력 7월3일) 미군 폭격기의 항공 폭격으로 주민 130여 명의 억울한 목숨을 앗아간 곳이다. 이날 미군 폭격기 8∼9대가 형곡동 일대를 융단 폭격하고, 기관총을 쏘아 130가구가 살던 마을은 쑥대밭이 됐다. 당시 요행히도 살아남은 주민은 "마을 도랑에 핏물이 흐를 정도로 참혹했다"고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대구함락 우려한 맥아더 장군
"왜관 북쪽 황무지 만들라" 명령
폭격 1시간만에 사망자 130여명
마을주민 대부분 같은 날 제사

유족측 진실규명·피해보상 요구
정부 등은 소극적 답변만 내놔
과거사정리위 지원사업 권고에
66년만에 희생자 위령탑 건립


◆아무 경고 없이 시작된 미군 폭격

1950년 여름은 6·25전쟁은 매우 유동적이었고 잦은 혼란을 겪던 시기로 인민군은 별다른 저지 없이 빠른 속도로 남한으로 밀고 내려왔다. 금산~영동~함창~안동선까지 진출한 인민군은 미군과 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낙동강을 건너 연합군 전선이 강화되기 전에 조기 결전을 강행했다.

당시 유엔군은 우회 기동, 포위와 야간침투를 조직적으로 저지할 충분한 병력이 부족했다. 국군은 산악지대와 동해안 지역을 담당하고 미군 제24사단은 김천·군위·의성에서 재편성했다. 미군 제1기병사단은 영동 일대를 담당하고 미군 제25사단은 상주 정면을 방어하면서 우세한 공군에 의한 폭격으로 남하를 저지하려는 지연 작전을 펼치는 상황이었다

구미시 형곡동은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로 6·25전쟁에도 안전하다고 소문이 난 곳으로 마을주민은 피란을 가지 않았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낙동강을 미처 건너지 못한 다른 지역 피란민도 많이 모여들었다. 폭격이 있었던 1950년 8월16일 마을주민은 평소와 다름 없이 밭일을 하거나 쉬면서 일상생활을 보냈고, 피란민은 형곡 냇가에서 더운 날씨를 피할 수 있는 하얀 천으로 천막을 쳐 놓고 있었다.

시무실 마을(70가구)과 사창 마을(60가구)로 나눠진 형곡동에는 폭격 당시 인민군은 없는 상태에서 아무런 경고 없이 폭격이 시작됐다. 그러나 "폭격 당일 아침에 인민군 4명이 마을로 내려와 돼지를 잡아갔다"라고 증언한 기록은 남아있다.

폭격 목격자는 "1950년 8월16일 오전 8시쯤 비행기 정찰에 이어 오전 10시쯤 B-29 폭격기 2개 편대가 남쪽에서 날아와 1시간 동안 폭격과 기총 소사 공격이 있었다"고 한결같은 증언을 했다. "이날 폭격으로 시무실과 사창 마을의 희생자는 131~133명에 이른다. 형곡 냇가에 모여있던 수많은 피란민이 희생되면서 사상자 핏물이 한여름 냇가에 흐를 정도로 참혹했다"는 증언도 여러 곳에 기록돼 있다.

◆미군 문서에 "융단 폭격 준비"

미군 문서에는 '1950년 8월16일 미군 1기병 사단에 구미시 형곡동을 포함한 사각 지역에 B-29 융단 폭격을 준비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라는 기록이 존재한다. 1988년에 발간된 푸트렐(Futrell) 박사의 논문에는 '1 기병사단 병력은 8월16일 칠곡군 왜관의 사각 지역에 B-29 융단 폭격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8월15일 공군은 총 260회 출격했고, 이 가운데 120회는 한국군 지역, 68회는 1기병사단 지역, 43회는 24·29·25사단 지역에서 이뤄졌다'라고 했다.

푸트렐은 '이날 폭격은 맥아더 장군의 지시와 오도넬 준장의 지휘로 이뤄졌고 미군은 폭격 지역을 12곳으로 나눠 지역당 폭격대대를 보내 자유낙하 폭탄 500 파운드형 3천84기와 1천파운드형 150개를 투하했다. 북한군의 8월 공세로 임시 수도였던 대구의 함락이 우려되고, 인민군은 낙동강 건너에서 병력을 증강하는 상황에서 맥아더 장군은 스트레이트 메이어 장군과 오도넬 장군을 불러 B-29를 총동원해 왜관지역 융단 폭격 임무를 부여했다.

왜관 북쪽의 일정 지역을 황무지로 만들라는 맥아더의 지시에 따라 폭격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임무를 수행한 것은 심리적 효과 때문으로 폭격 지역 언저리의 형곡동은 인민군 소재와 관계없이 대구를 지키려고 펼친 융단폭격의 대상이 됐다'라고 기록했다.

1950년대-형곡동위령탑건립사(책자)_65
1950년대 구미시 형곡동(시무실·사창 마을) 전경. <구미시 제공>


◆"마을에는 인민군 없고 피란민뿐"

2008~2010년까지 정부의 진실화해위원회는 형곡동 폭격을 목격한 주민을 대상으로 목격자 진술과 증언을 녹취했다. 당시 진술인은 한결같이 "형곡동에는 인민군은 전혀 없는 상태에서 피란민 수백 명이 모였고, 남쪽으로 3㎞가량 떨어진 산악지대 3곳에 인민군이 집결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미군 폭격으로 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강응구(당시 21세)씨는 "미군기 폭격 전날에는 정찰기를 확인했고 폭격일 오전 10~11시에는 전폭기 8대의 기총소사와 폭격으로 마을 뒷산인 토깡골에서 소먹이를 하던 아버지와 집에 계시던 어머니가 모두 돌아가셔서 형님과 함께 부모님 시신을 수습했다"고 증언했다.

가까운 이웃과 친인척 11명이 폭격으로 숨진 것을 목격한 박태식(당시 19세)씨는 "1950년 음력 7월2일 오전 8시쯤 프로펠러가 달린 정찰기 1대가 산 높이와 비슷한 고도 300m에서 2바퀴 돌면서 정찰을 했고 다음 날에는 전폭기 8대가 편대를 이뤄 남쪽에서 날아와 5분 정도 폭격했다. 2㎞ 떨어진 사창마을보다 시무실 마을에서 많은 사람이 희생됐고, 사창 마을에선 형곡 냇가를 집중적으로 폭격했다"고 진술했다.

어머니와 누나·여동생이 희생된 김교탁(당시 15세)씨는 "미군 폭격이 시작된 오전 11시에 가족은 모두 집에 있는 상태에서 폭탄이 떨어져 아버지와 자신은 구사일생해 가족의 시신을 수습했다. 시무실과 사창 마을 130~140가구는 모두 파괴되거나 불에 탔다"고 기억했다.

형·누나·고모부가 미군 폭격으로 사망을 목격한 김재수(당시 11세)씨는 "폭격 당시 사망한 가족은 시무실 집에서 쉬고 있었고, 오전 11시쯤 갑자기 전폭기 4~5대가 날아와 논에 모를 심는 형태로 집중적으로 포격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라는 목격담을 녹취록에 남겼다.

◆정부·미국, 사망자 피해보상해야

미군 오폭 피해 유족으로 구성된 형곡동위령탑건립위원회는 1992년 국방부에 진실 규명과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했으나 "미국의 ‘미’도 꺼내지 말라"는 냉담한 답변만 돌아왔다. 형곡동위령탑건립위원회는 1992년과 2005년 두 차례에 걸쳐 또다시 위령탑 건립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구미시에 냈으나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답변뿐이었다. 현재 피해 주민과 유가족은 "미군 오폭으로 형곡동 주민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사실이 명백히 밝혀진 만큼 정부와 미국은 사망자와 유가족에 대한 명예회복과 피해 보상에 나서라"고 요구했다.

훗날 확인된 미군 문서에는 '미8군은 형곡동·왜관읍 등에 B-29 융단 폭격을 준비하라'고 명령한 내용이 확인됐다. 미군은 임시 수도였던 대구의 함락을 우려해 적군의 전투력과 사기를 꺾을 목적으로 인민군 병력이 은신했다고 의심한 민간인 마을을 폭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형곡동 희생자 유가족들의 당시 마을엔 인민군이 없었다는 진술에 따라 과거사위원회는 미군 폭격을 인정했다.

1992년 결성된 형곡동위령탑건립위원회는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정서를 넣었다.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10년 6월 미군 폭격으로 최소한 29명이 사망했다고 규명한 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희생자 위령 사업을 지원하라'고 권고했다. 이에 따라 2016년 8월 구미시 형곡동 산33-5에서는 6·25전쟁 당시 미군 폭격기의 오폭으로 희생된 고인들의 넋을 달래자는 주민과 유족의 노력으로 66년 만에 '6·25전쟁 형곡동 폭격희생자 위령탑'이 세워졌다.

백종현기자 baekj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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