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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대구경북 아픈 역사의 현장] (6) 6·25전쟁 당시 포항 미군폭격 사건…미군, 100가구 민가 무차별 폭격…1천여명 피란처엔 함포사격

2021-09-14

위령제
한국전쟁 폭격사건 민간인희생자 포항유족회와 자유총연맹 포항시지회 관계자들이 지난 3일 포항시 북구 흥해읍 도음산 산림문화수련장에서 위령제를 지낸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포항시 제공〉

지난 3일 오전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도음산 산림문화수련장. 이날 이곳에서 6·25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포항지역 민간인들을 기리는 위령제가 열렸다. 한국전쟁 폭격사건 민간인희생자 포항유족회(회장 허맹구)와 자유총연맹 포항시지회는 2015년 8월 경북도와 포항시의 도움으로 이곳에 위령탑을 세우고 매년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도음산은 6·25전쟁 때 낙동강 전선의 배후지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위령탑 뒤편에는 위패 봉안벽이 병풍처럼 둘러섰으며 미군 폭격에 희생된 민간인 135명의 이름과 실명이 불확실한 5명에 대한 내용이 돌에 새겨져 있다. 포항유족회 허맹구 회장은 " 청소년과 등산객이 많이 찾는 이곳에 위령탑이 세워져 6·25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면서도 "잊어서는 안될 사건이 서서히 잊히는 것이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전국에서 셋째로 희생자 많아

1950년 8월 북한 인민군은 영덕을 거쳐 포항까지 점령했다. 이에 미군이 특수부대를 급파해 함포사격과 공중폭격을 진행해 인민군이 포항 외곽 산악지대로 철수하는 등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 8월16일 미8군은 포항 독석리 해안에 고립된 국군 3사단의 해상철수를 돕기 위해 예방공격(豫防攻擊)을 했는데, 이 과정에 북송리 등 포항지역 곳곳이 폭격당했다. 이 같은 공격이 9월 말까지 이어지면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포항유족회에 따르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결과, 6·25전쟁 당시 포항에서는 13개 마을에서 550여 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희생된 것으로 파악됐다. 이 중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189명이다. 성별로는 남성 81명·여성 108명으로 여성이 57.1%를 차지했다. 연령별로는 0∼20세(희생 당시 나이 기준)가 86명(47%)을 차지했고, 청장년층인 21∼40세 54명(29.5%), 41∼60세 27명(14.8%), 노년층인 61세 이상 16명(8.7%)이다. 미성년자와 노년층이 총 102명으로 전체 55.7%에 달한다. 또 일가족 내 2인 희생사례는 44건이며, 이 중 한 가족에서 7명이 희생된 사례도 있었다.

포항유족회 관계자는 "미군 폭격 사건이 발생한 전국 21개 지역의 희생자들 중 진실이 규명된 희생자 1천109명 중 포항지역 희생자는 모두 141명으로 전국에서 셋째로 희생자가 많은 곳"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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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하늘 날벼락 맞은 북송리

# 흥해읍 북송리 사건
부역 징집자 복귀 마을 잔칫날
폭탄 투하·사격 100여명 사망
흥안·마산리 등지도 폭격 피해


포항시가지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북구 흥해읍 북송리. 6·25전쟁 당시 100가구 정도가 살았던 이 마을에서는 인근 영덕전투에 부역으로 징집됐다가 돌아온 사람들을 축하하기 위해 주민들이 모여 돼지를 잡고 있었다.

낮 12시쯤 프로펠러가 1개 달린 검은 비행기가 2대씩 짝을 지어 포항 쪽에서 날아와서 마을 상공을 지나갔다. 그 후에 비행기 2대가 저공으로 마을을 2∼3바퀴 선회했다. 점심을 먹고 있을 무렵 검은 비행기 20대 정도가 날아와 다시 동네 위를 선회한 후 곧바로 폭격을 시작했다.

적어도 30분 이상 폭격을 했는데 당시 비행기가 거의 지붕에 가까이 날아와서 폭탄을 투하하고 사격을 했다. 폭탄이 떨어져서 사람 키 이상의 깊고 큰 구덩이가 생긴 곳도 있었다. 폭격으로 불이 났고, 그 불이 다른 집으로 옮겨붙어 3개 마을(큰 동네 70가구, 작은 동네 10가구, 서쪽 양촌 20가구)중 큰 동네의 3분의 2가 전소됐다. 이 폭격을 마치고 비행기는 동쪽 방향으로 날아갔고 당일 20여 대의 무리를 지은 검은 비행기가 다시 북송리를 포함한 흥해 지역 상공을 약 10~20분에 한 번씩 여러 시간 선회했고, 흥안·마산리 등이 폭격당했다. 마을과 인접한 곡강천변의 소나무 숲에는 피란 나온 주민들로 넘쳐났다. 이날 폭격으로 이 마을에서는 희생자가 100여 명에 이르렀고, 이 중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53명이었다.

◆'제2의 노근리' 포항 송골해변

# 환여동 송골해변 사건
국군 "피란민 속 북한군 섞여"
포격 요청에 美군함서 15발 쏴
100여명 숨지고 수백명 다쳐


북송리 못지않게 피해가 큰 곳이 북구 환여동 '송골해변' 이다. 이 사건은 1999년 충북 영동의 노근리 사건이 알려진 뒤 피해자와 유가족이 국회에 진상을 요구하는 청원을 제기하면서 밝혀져 '제2의 노근리' 사건으로 불리기도 한다. 영국 BBC 방송은 2001년 5월부터 포항 현지 취재에 나서 당시 정황을 확인해 다큐멘터리 '모두 죽여라'(Kill Them All)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을 만큼 해외에도 잘 알려진 사건이다.

1950년 9월1일 오후 2시쯤 포항 송골해변 앞바다에 미 군함(헤이븐호)이 나타나 30~40분간 육지 쪽으로 집중 포격을 가해 100명 이상 숨지고 수백명이 다쳤다. 송골해변은 높이 10m 정도의 절벽 아래 백사장으로, 포항 시내에 진주한 북한군이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 주민들이 피란처로 삼은 곳이다.

유족에 따르면 해변에서 1㎞쯤 떨어진 바다에 있던 군함이 갑자기 피란민들이 모여 있던 백사장을 향해 포격을 했다는 것. 당시 너비 10m 길이 1㎞ 정도의 백사장에는 포항 주민 등 1천여 명이 피란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한 유족은 "점심을 먹고 쉬고 있던 중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비를 피하려고 우왕좌왕하자 정찰기 한대가 머리 위를 저공비행한 뒤 곧바로 포격이 시작됐다"고 증언했다. 그는 포탄이 터지자 죽천리 쪽으로 도망가 목숨을 건졌으나 형과 형수가 그 자리서 숨졌다고 말했다.

그는 "포격이 멈춘 뒤 백사장과 앞바다가 온통 핏빛으로 물들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널려 있는 시체 더미에서 가족들의 시신을 찾았다"며 "적어도 100명 이상이 숨졌다"고 주장했다.

당일 헤이븐호는 '해안 함포사격통제반(SFCP)'으로부터 함포사격 명령을 받자 목표물이 피란민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재확인을 요청했다. 통제반은 "육군으로부터 피란민 속에 인민군이 섞여 있다는 정보와 함께 포격 요청을 받았다"며 함포 사격을 명했다. 헤이븐호는 좁은 해변에 밀집해 있던 노인과 여자, 어린이가 대부분인 1천여 명의 피란민에게 10여 분간 함포 15발을 쐈다.

포항유족회 측은 "이 사건은 6·25전쟁 중 발생한 미군의 민간인 포격사건 중 유일한 함포사격 사건이지만 지금은 잊힌 사건이 되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멀고 먼 국가 배상의 길

# 특별법 제정 하세월
수많은 민간인 미군폭격 희생
배·보상 입법 번번이 '물거품'
유족들 "잊혀선 안 되는 사건"


6·25전쟁 당시 전국 곳곳에서 많은 민간인이 미군의 포격으로 희생됐지만 유족들은 국가로부터 배·보상을 받기는 너무나 힘들다. 전국적으로 '한국전쟁 후 민간인 희생자 진상규명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지역 또는 개별적으로 추진됐으나 국가의 배·보상 조항 때문에 모두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실패했다. 이후 개별 입법(지역별)보다는 통합(전국)입법이 추진됐으나 이마저도 국회 문턱을 넘기지 못한 채 해를 거듭하고 있어 유족들의 가슴만 아프게 하고 있다.

하지만 포항 송골해변사건은 유일하게 재심 끝에 국가배상을 받은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송골해변 미군 함포사건으로 아버지와 동생을 잃었던 방모씨는 69년 만인 2019년 국가배상을 판결을 받았다. 서울고법 민사7부는 방모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재심에서 원고 패소 원심을 깨고 "4천800여 만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방씨는 "헤이븐호가 단순 피란민으로 보이는데 왜 함포사격을 하느냐고 국군에 재확인까지 요청했는데 국군은 다시 함포사격을 명령했다"며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 배경을 설명했다. 포항유족회 관계자는 "유일하게 국가배상 판결을 이끌어낸 소송에 많은 유족들이 참여하지 못해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말했다.

마창성기자 mcs12@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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