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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19) 이기홍] 대구시립교향악단을 한국 대표 시향으로 이끈 '교향악 운동' 선구자

2021-09-27

서울시향 창단되던 1957년 대구교향악단 출범시키고도 재정난에 해체 '아픔'
우여곡절 끝 1964년 국내 셋째로 대구서 시향 창단...15년간 상임지휘자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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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1926~2018)은 1964년 대구시립교향악단을 창단하고 초대 상임지휘자를 역임했다. 그는 한국전쟁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1950년대 후반 대구에서 교향악 운동의 씨앗을 뿌리고, 그 싹을 틔워 가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대구의 예술 분야는 특히 거의 불모지와 다름없던 시대였다. 그 황량하고 각박한 현실 속에서도 클래식 음악을 통해 시민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기 위해 주변의 음악가들과 함께 교향악을 일구고 발전시키는데 온 열정을 쏟았다. 그는 1957년 대구현악회를 결성해 연주회를 가지면서 대구 최초의 현악앙상블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이를 발전시켜 마침내 대구시립교향악단 창단을 일궈냈다. 그는 창단 이후 15년 동안 상임지휘자를 역임하면서 대구시립교향악단을 한국의 대표적 교향악단으로 자리 잡게 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기홍은 1926년 2월 경북 영천군 금호면 냉천동에서 태어났다. 3남 1녀 중 막내였다. 금호초등학교 1학년 담임은 아동문학가 윤석중(1911∼2003)이었다. 동요 '어린이날 노래'의 가사(시)를 지은 그 주인공이다. 이기홍의 바로 위 형님은 일본 동양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했고, 자형은 바이올린을 전공한 음악가였다. 이러한 음악적 환경 속에서 그는 경주중학교 재학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바이올린 전공으로 서울대 음대에 입학, 바이올리니스트 양성식과 첼리스트 양성원의 아버지인 양해엽과 함께 바이올리니스트 박민종(1918∼2006)의 가르침을 받았다. 졸업하던 해인 1950년에 서울교향악단에 입단했으나 곧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대구로 내려오게 되었다. 대구에 있으면서 가두 모병을 통해 입대, 해군정훈음악대(악장 박민종)에서 제1바이올린 연주자로 2년간 활동했다. 휴전 후 대구에서 대구여중, 능인중, 경북여고 등의 음악교사로 지내면서 바이올린 개인교습도 했다. 효성여대와 영남대 강사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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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립교향악단 전신인 대구교향악단 창단연주회(지휘 이기홍)가 1957년 12월 대구 문화극장(옛 한일극장)에서 열렸다. 〈대구시 문화예술아카이브 제공〉

◆대구 교향악 운동의 선구자

이기홍은 대구 지역 1세대 바이올리니스트이자 교향악 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그가 교향악 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능인중학교 재직 시절부터였다. 전쟁의 상처를 수습하느라 문화예술에 관심을 기울일 환경이 아니던 때였다. 당시 클래식 음악은 교회 등 종교기관이 펼치는 행사가 전부일 정도였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주 형태의 기악운동을 펼쳐보고자 했고, 바이올린을 배우는 제자들을 중심으로 1957년 3월 대구현악회를 창단했다. 단원은 바이올린 연주자 16명, 첼로 연주자 3명, 베이스 연주자 1명으로 구성됐다. 대구현악회는 같은 해 6월 청구대 강당에서 창단공연을 했다. 모차르트의 현악합주곡 '세레나데' 등을 연주했다. 바리톤 이점희, 피아니스트 김종환 등이 출연했다.

이기홍은 대구현악회를 창단하면서 지휘 활동도 함께 시작했다. 그의 주도로 대구 지역 최초의 현악 앙상블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 단체는 2군군악대 관악기 연주자들과 함께하면서 대구교향악단으로 확대되고, 1957년 12월 대구 문화극장(옛 한일극장)에서 창단연주회가 열렸다. 이날 연주에는 당시 대구에서 활동하던 거의 모든 클래식 연주자들(50여 명)이 연주에 참여했다.

하지만 대구교향악단은 1년도 되지 않아 심한 재정난을 겪게 되면서 하영수(한일미유주식회사 사장)의 후원을 받아 그를 단장으로 추대했다. 명칭도 대구관현악단으로 바꿨다. 그 덕분에 1958년 대구관현악단 창단연주회를 시작으로 5년 동안 악단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기홍은 대구관현악단이 다시 재정난에 처하자 경북도지사, 대구시장, 한국예총 대구지부장, 대구방송국장 등의 도움을 얻어내 1963년에는 대구방송관현악단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2월에 대구방송국 공개홀 KG홀에서 창단공연을 가졌다. 이기홍이 지휘를, 바이올리니스트 안종배가 악장을 맡았다. 이 공연 후 작곡가 안익태를 비롯해 세계적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 등 세계 유명 음악가들로부터 축전이 이어졌다. 창단 소식을 세계적 음악가들에게 미리 알렸음은 물론이다.

'대구교향악단 창단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이 단체는 한국에 있는 음악가들, 음악 애호가들을 비롯해 일반 사람들 모두에게 행복과 문화적 충만함을 가져다 줄 것으로 확신한다. 음악은 시대를 가리지 않고 어디에서나 소통되는 신비로운 언어이며, 모든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는 신의 선물임을 믿는다.'

파블로 카잘스(1876~1973)가 대구방송교향악단 창단 연주회를 축하하며 보낸 편지의 일부다. 카잘스의 이 편지는 대구방송교향악단 창단 연주회가 끝나고 한 달가량 뒤에야 도착했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어렵게 교향악 활동을 하고 있는 대구 음악가들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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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현악회 창단 연주회 연습 모습(1957년). 뒷모습의 인물이 이기홍이다. 〈대구시 문화예술아카이브 제공〉

◆1964년 대구시립교향악단 창단 연주회

이기홍을 중심으로 한 이 같은 대구 교향악 발전을 위한 지역 음악인들의 활발한 활동과 노력은 마침내 대구시립교향악단으로 이어졌다. 이듬해인 1964년 11월 대구시립교향악단으로 창단된다. 대구시는 조례를 제정해 정식으로 대구시립교향악단을 창단하고, 초대 상임지휘자로 이기홍을 선임했다. 1964년 12월17~18일 KG홀(현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창단기념공연을 개최했다. 단원은 40명이었다.

베토벤의 '교향곡 제1번 C 장조', 현제명의 가곡 '그 집 앞',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더 날지 않으리', 민요 '천안삼거리' '베틀가' '방아타령', 로시니의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서곡, 글린카의 '루슬란과 루드밀라' 등이 연주되었다. 바리톤 이점희와 피아니스트 최명자가 협연했다.

이기홍은 1979년 10월까지 대구시향을 이끌었다. 그 후 부산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로 초청돼 2년간 지휘봉을 잡았다. 그리고 부산 경성대 교수로 재직하며 1997년 퇴임 때까지 부산에서 지내다 퇴임 후 대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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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음악가협회 결성 모임 기념 사진(1956년). 앞줄 왼쪽부터 이기홍, 장안나(소프라노), 이경희(피아니스트), 이점희(바리톤). 〈대구시 문화예술아카이브 제공〉

대구시립교향악단은 국내 세 번째로 창단된 시립교향악단이다. 1957년에 서울시립교향악단이, 1962년에는 부산시립교향악단이 창단됐다. 이기홍은 당시 대구가 문화예술과 교육 등의 측면에서 부산보다 훨씬 더 나았는데도 부산이 먼저 시립교향악단을 창단했다며 무척 속상해했다고 한다.

1964년에 창단된 대구시립교향악단은 다음 달 15일 제478회 정기연주회를 앞두고 있다. 대구시민회관이 클래식 음악 콘서트 전용홀로 변모한 후인 2014년 4월부터 불가리아 출신의 지휘자 줄리안 코바체프가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재임하고 있다. 코바체프가 지휘하는 대구시립교향악단은 코바체프 취임 이후 거의 모든 정기연주회가 객석 매진을 기록하는 등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2016년 가을에는 처음으로 유럽 3개국 투어(독일 베를린 필하모니홀, 체코 프라하 스메타나홀, 오스트리아 빈 무지크페라인 황금홀) 연주회를 하기도 했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교향악 운동에 매진했던 이기홍은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현재 대구의 음악계는 교향악 운동을 하면서 오로지 음악 발전을 위해 헌신한 수많은 음악인들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 이는 특정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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