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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21) 정소산] 궁중무희 마지막 세대...그의 춤은 왜 50년 넘도록 문화재 등록이 이뤄지지 않는가

2021-10-25

조선·달성권번 춤 지도, 한국적 소재 창작 무용 만들어 본인 공연보다 제자 통해 꾸준히 무대 올려
궁중무용의 장중함과 민속무용의 소박한 춤정신 담아 만든 '수건춤' 대구시 무형문화재로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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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산. 백년욱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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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0월9일부터 10일까지 열린 제3회 백년욱 무용 발표회 공연기념 사진. 첫째줄 오른쪽 셋째가 정소산 선생, 둘째줄 가운데는 백년욱씨. <백년욱씨 제공>

정소산(1904~1978)은 궁중무희 마지막 세대로, 대구 근대한국무용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궁중무용을 전승하고 후진 양성에 힘썼던 무용가로, 왕성하게 활동하며 대구 전통무용의 기반을 다졌다.

정소산은 1904년 대구 중구 동성로3가 12에서 정사윤과 박난파의 13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박난파는 한때 약방 기생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어릴 때부터 남달리 춤을 좋아한 정소산의 소질을 일찌감치 발견했다. 이에 5세였던 정소산을 당시 명무였던 채희로부터 처음 춤을 배우게 했다. 6세쯤에는 대구시 기생조합 김수희 조합장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19세 때는 당대의 명인으로 손꼽힌 하규일에게 본격적으로 법무를 익힌다. 23세 때는 한성준으로부터 승무를 배우기도 한다. 그 후 정소산은 조선권번, 달성권번 등 권번(조선시대 기생을 총괄하던 기생청의 후신)에서 춤을 지도하고, 숙명여고 무용교사를 지냈다.


◆궁중무용 전승과 함께 창작무용 활동

그가 처음으로 발표회를 연 건 1946년이다. 1948년에는 대구 하서동에 후진 양성을 위해 '정소산고전무용연구소'를 열고 본격적인 고전무용 전승 및 후진 양성을 하게 된다. 정소산은 본인의 공연은 많이 하지 않았다. 그는 제자에게 어울리는 작품을 골라 연습시켰고, 제자들의 공연을 통해 창작 작품을 지속해서 선보였다.

그의 춤은 궁중무용이 주를 이루지만, 창작무용에도 재능이 있었다. 창작무용 작품으로 '논개' '계월향', 창작무용극 '구운몽' 등을 선보였는데 한국적인 소재를 다뤘다. 정소산 선생은 이야기가 있는 무용작품을 만들기 위해 역사적 사실 등에 대해서 꼼꼼히 확인하는 등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는 전국민속무용경연대회 연출과 안무, '제1회 신라문화제' 참가 무용단 작품 안무 등을 했으며, 초대 경북 국악협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고(故) 정막 평론가는 2008년 12월 월간 대구문화와의 인터뷰에서 정소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분이 대쪽같은 성품이셨지. 춤을 매개로 돈벌이는 생각지도 못했고, 아니다 싶으면 타협하는 법이 없었어요. 궁중무용, 이런 것은 어떤 틀 안에서 해야 되잖아요. 그분이 비록 궁중무용을 배웠지만 아이디어가 풍부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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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산 선생. <영남일보 DB>
◆궁중무용과 민속무용의 특징을 지닌 '수건춤'

정소산의 대표적인 춤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인 2015년 대구시 무형문화재 18호로 지정된 '수건춤'이다. 그의 춤을 유일하게 이어가고 있는 제자인 백년욱씨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어 있다.

과거 '즉흥무' '대구흥춤'이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올랐던 수건춤은 스승 하규일의 영향을 받은 춤으로 정소산의 춤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궁중무용의 특징인 장중함, 단아함, 절제미와 민속무용이 가진 소박함과 투박함이 느껴지는 게 이 춤의 특징이다. 이 춤은 크게 돌아다니지 않고 거의 제자리에서 춘다. 한 바퀴 이상 돌지 않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는 자세로 춤을 춘다. 춤 후반부에는 흥이 오르면서 민속무용의 특성이 드러난다.

백씨는 "선생님은 단아하고 춤을 무겁게 춰야 한다고 하셨다. 교태를 부리면서 (몸을) 흔드는 춤을 싫어하셨고, 춤이 기품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이 춤은 내가 춰봐도 그런 느낌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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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산 선생이 화단에 앉아 있는 모습. <대구문화예술아카이브 제공>
정소산 선생은 이 춤의 의상으로 특히 색동옷을 선호했다고 전해진다. 춤에 사용되는 수건은 정소산 선생이 제자를 지도할 때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과 유사한 길지 않은 수건이다. 이는 주로 긴 수건을 사용하는 살풀이와는 차이가 있다. 반주로는 국가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예능보유자 이생강 선생의 연주만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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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대구 중구 남산동의 한 건물에 '정소산무용학원' 간판 흔적이 남아 있다. 이 곳은 정소산 선생이 가장 마지막으로 학원을 운영한 곳이다. 최미애 기자
수건춤보다 앞서 1967년 정소산 선생의 춤 중 검무 등 궁중무용이 춤의 가치 및 중요성을 인정받아 문화재 지정 심사가 진행됐고, 이를 조사, 연구해 문화재로 등재하기 위한 활발한 활동이 있었다. 하지만 어떠한 사유로 인해서인지 오늘날까지 등재되지 못한 상태다.


최미애기자 miaechoi21@yeongnam.com
▨참고자료=영남춤학회 창간호 '정소산류 대구흥춤의 특징과 가치', 예술담론계간지 '대문' 201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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