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철 (대구시 위생정책과주무관) |
'집밥' '혼밥' '배달 앱' '먹방' '맛집' '식당 별점' '밀키트' '오늘 점심' '회식 장소'….
우리가 늘 접하는 키워드 중 음식에 관련된 단어는 수없이 많다. 혹자는 인류 역사의 99.9%는 먹거리를 찾아다닌 시간이었다고 한다. 먹는 행위는 곧 생존 활동이었으니 먹거리가 음식을 만들고 그 음식이 문화와 역사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우리는 늘 '무엇을 하며 먹고 살 것인가'하는 철학적 관점에서부터 '오늘 점심은 뭐 먹지'와 같은 일상의 소소한 결정까지 먹는 것으로부터 단 한 순간도 자유로울 수 없다. 여행을 가도, 출장을 가도 마찬가지다. 늘 그 지역의 향토 음식과 맛집을 경험하고 싶은 욕구를 감출 수가 없다. 그래서 음식은 한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생활 습관과 정서, 가치관 등이 모인 대표적인 '문화 코드'라고 일컬어진다.
그렇다면 대구의 음식은 어떠한 '문화 코드'를 갖고 있을까. 대구를 처음 방문하는 외지인들에게 소개할 대구 대표 음식이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는 말을 듣거나 대구 음식은 단순히 맵고 짜다는 외지인들의 평을 들을 때면 괜히 속상해진다. 사실 대구는 바다가 있어 화려한 해산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역사적으로 임금에게 진상을 올릴 만한 특산품이 풍부한 것도 아니었다. 영남 내륙의 분지였던 대구에 화려한 음식문화가 발전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선시대 3대 시장 중 하나인 서문시장(큰장)이 있었던 대구는 물산의 집결지이자 유통의 중심지였고 경상감영이 있어 영남의 정치·문화의 대표도시였다. 6·25 전쟁 때는 최후의 방어선이자 임시 수도였고, 전후에는 삼백산업(설탕·밀가루·면방직)의 중심지 중 하나였으며, 1970~80년대 섬유산업은 대구를 대도시로 견인했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이 수출 강국으로 우뚝 서는 데 일조했다.
숨 가쁘게 달려온 대구의 역사에 대해 이렇듯 열거하고 보니, 대구는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의 중심에서 나라의 운명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성장한 것 같다.
대구를 대표하는 음식인 대구 10미(味) 중에는 50~60년대 국가정책인 혼분식장려운동과 연계된 밀가루 음식이 많고, 따로국밥처럼 6·25전쟁 때 피란민들 사이에서 폭발적 인기를 끈 것도 있고, 수출역군인 섬유 공단 노동자들의 술친구가 되어 주었던 안줏거리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또한 IMF 환란 직후, 붐을 일으켰던 '막창'과 신메뉴로 개발되었던 '논 메기 매운탕'은 대구 음식이 '외환위기' 극복이라는 시대정신과 무관치 않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대구의 음식은 대구의 역사다. 그 역동의 세월을 살았던 대구 사람들에게 대구의 음식은 먹고 살기 바빴던 시대의 소중한 한 끼였고, 고된 노동을 잊기 위해 술 한잔하며 같이 먹었던 안줏거리이자 동반자였다.
숨 가빴던 근대화와 산업화의 시간 속에 있었던 대구는 광역시가 되고 대한민국 3대 도시로 성장한 바 있다. 그 화려한 역사의 시간 속에서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며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하나의 역사가 될 수 있다고 본다면, 그들이 즐겨 먹었던 소박한 대구 음식들은 결코 부정할 수 없고, 폄훼할 수 없는 대구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미식가인 '브리야 사바랭'은 그의 저서에서 "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 주겠다"고 말한 바 있다. '브리야 사바랭'의 말을 빌려서 표현하자면, 대구의 정체성과 시대정신이 담긴 대구 음식에 대해 단순히 '맛' 하나만으로 평가받는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힘들었던 세월, 같이 웃고, 같이 울며 대구에 살았던 선배 대구인들의 땀과 헌신을 존중한다면 우리는 대구 음식을 이렇게 평가해야 옳다. "대구는 맛있다."
이상철 (대구시 위생정책과 주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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