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닫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
    스토리
  • 네이버
    밴드
  • 네이버
    블로그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221218010002176

영남일보TV

[스토리가 있는 청도 힐링 여행 . 5·<끝>] 금천면 선암로, 운림고택 중사랑채 판벽 구멍 셋…'400년 내시家系' 삶 엿보는 듯

2022-12-20

(조선 후기 내시 정3품 김일준이 낙향해 살았던 집)
공동기획 :

2022121801000537600021761
운림고택(雲林古宅)은 조선 후기 궁중 내시(內侍)로 정3품 통정대부에 올랐던 김일준(金馹俊)이 낙향하여 건립한 주택이다. 그래서 내시고택·김씨고택이라고도 불린다. 대문에서 사랑마당을 거쳐 안마당으로 출입하는 중문까지 모든 통과 공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일반 사대부 저택보다 한층 더 엄격하게 내외 공간을 구분하고 출입을 관리하는 배치다.
2022121801000537600021762
앞쪽이 중사랑채와 돌담 뒤 판벽 모습.
금천면은 청도의 산동 가운데에 위치한 면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중동면이라 했다. 면의 중앙부에는 밀양강의 지류인 동창천(東倉川)이 흐른다. 이곳 사람들은 비단같이 아름다운 천이라 하여 비단내 또는 금천(錦川)이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금천면으로 개칭했다. 청도읍에서 청려로를 타고 산동으로 가다 보면 매전면 매전삼거리에서 선암로가 분기한다. 동창천 건너 금천면 신지리(薪旨里)를 지나 동창천을 거슬러 금천면 소재지인 동곡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선암로는 '선암서원(仙巖書院)을 지나가는 길'이라는 뜻이다.

面 중앙부엔 밀양강의 지류인 동창천
士禍시대엔 사흘 핏빛 물 거꾸로 흘러
박하담·김대유 배향한 선암서원 지나
밀양박씨 터 잡은 신지리 길 양쪽으론
도열하듯 도일·섬암·운남·운강고택…
임당리 '명포길'은 포구 흔적 담은 이름


2022121801000537600021763
선암서원은 소요당 박하담과 삼족당 김대유를 배향한 곳이다. 안채와 사랑채인 득월정·행랑채·선암서당 현판이 걸려 있는 소요당·장판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살림집과 절충식으로 지어져 서원이라기보다는 별서의 느낌을 준다.
◆선암로 신지생태공원·선암서원

선암로에서 선암서원 이정표를 따라 왼쪽 고샅길로 들어선다. 서원 가는 길에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키 큰 곰방대다. 세상에서 가장 크다는 곰방대는 높이가 36m나 된다. 옛날 이곳에는 세라믹 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사용되었던 굴뚝을 곰방대로 변신시켜 놓았단다.

곰방대를 중심으로 꽤 넓은 신지생태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공장으로 인해 단절되었던 천변의 녹지를 되살리고 걷기는 물론 유모차나 휠체어도 다니기 좋은 공원으로 재탄생됐다. 공원을 중심으로 동창천변을 소요하는 4㎞의 생태탐방로도 있다. 공원에는 박훈산 시인의 '보리 고개' 시비가 있다. 1919년 신지리에서 태어난 시인은 1946년부터 국제신보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학활동을 시작했고 6·25전쟁 때는 공군 종군문인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조지훈·유치환 같은 문인들과 교류를 맺었다고 한다. '봄은/ 보리 고개/ 숨 가쁜/ 계절/ 꽃은/ 제멋대로/ 피어라.' 한겨울에도 이 구절을 읊으면 어쩐지 숨이 가쁘다.

공원을 지나 호젓한 소나무 오솔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면 선암서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선암서원은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과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를 배향한 곳이다. 박하담은 1520년에 밀양에서 이곳으로 들어와 동창천변에 소요당을 짓고 이웃 마을의 김대유와 우정을 나누며 평생 은거했다. '하늘을 위로 하고 못을 아래로 하여 여기에서 소요하고, 고금을 포섭하여 여기에서 소요하여 자적(自適)의 즐거움을 깃들이니, 마침내 집의 이름을 소요(逍遙)라고 하였다'고 한다.

신지리에 들어온 박하담은 김대유와 함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창고를 짓고 곡식을 모았다. 가뭄과 기근이 들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창고의 이름은 동창(東倉), 그래서 강은 동창천이 되었다. 사화의 시대에 이 천은 사흘 동안 핏빛으로 물들어 거꾸로 흘렀다고 했다. 지금 동창천은 바닥이 고스란히 보이는 물 맑은 천이다. 박하담은 나라에서 여러 번 불렀지만 나가지 않았고 후학을 가르치다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서원은 원래 1568년에 매전면(梅田面)에 향현사(鄕賢祠)로 창건되었다가 1577년에 군수 황응규(黃應奎)가 지금의 자리로 이건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878년에 박하담의 후손들이 다시 중창하여 선암서당으로 고쳤다고 한다. 서원은 안채와 사랑채인 득월정(得月亭)·행랑채·선암서당(仙巖書堂) 현판이 걸려 있는 소요당·장판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살림집과 절충식으로 지어져 서원이라기보다는 별서의 느낌을 준다.

동창천과 마주한 담장을 따라 장쾌한 소나무들 사이로 오솔길이 흐른다. 서원 밖 천변 일대를 '소요대'라고 부르는데 '소요당이 소요하던 대'라는 뜻일 게다. 담벼락 가운데 천으로 통하는 사주문이 나 있고 그 앞 물가에 기묘한 바위가 있다. 바위 아래에 깊은 소(沼)가 있는데 선호(仙湖)라 한다. '선인(仙人)이 우유(優遊)할 만한 곳'이라는 뜻이다. '선바위가 있어서 선호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선암(仙巖)이 바로 이 바위라 여겨진다. 바위가 용머리를 닮아 용두암, 용두소라고도 하는데 1959년 태풍 사라 때 용의 목에 해당하는 부분이 떨어져 나가 지금은 밑둥치가 남아 있다. 선호 건너편으로 '뚝뫼'라 불리는 봉긋한 언덕의 솔숲이 보인다. 서원의 뒤로 돌아들면 1974년에 건립된 '임란창의의사전적비'가 있다.

2022121801000537600021764
밀양박씨들이 터를 잡고 살아온 신지리에는 오래된 집이 많다. 약 40동의 기와집이 있는데, 신지리는 청도에서 고택이 가장 많은 마을이라 한다. 섬암고택은 운강 박시묵(朴時默)의 둘째 아들인 박재소가 분가하면서 건립한 것이다.
◆선암로 따라 고택 가득한 밀양박씨 마을

박하담이 세상을 떠난 후 마을의 역사는 그의 후손들이 이어나갔다. 임진왜란 때는 그의 후손인 밀양박씨 14의사(義士)가 의병을 일으켰다고 전한다. 부자·형제·사촌이었던 사람들이다. 그들 중 천성만호(天城萬戶) 박경선(朴慶宣)은 전투 중 한쪽 팔목이 잘려 나가자 적장을 끌어안고 어성산의 절벽인 봉황애에서 동창천으로 몸을 던졌다. 선암서원의 '임란창의의사전적비'는 이들을 기리는 것이며 비석의 뒤편으로 보이는 동창천변의 단애가 봉황애라고 한다.

밀양박씨들이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아온 신지리에는 오래된 집이 많다. 선암서원을 위시하여 약 40동의 기와집이 있는데, 신지리는 청도에서 고택이 가장 많은 마을이라 한다. 선암로 양쪽으로 도일고택·섬암고택·운남고택·명중고택·운강고택 등이 줄줄이 이어진다. 여든여덟 칸이라는 운강고택은 박하담의 서당 자리에 운강(雲岡) 박시묵(朴時默)이 1824년에 중건한 집이다. 도일고택은 운강의 동생인 박기묵이 1899년 합천 군수로 있을 때 건축한 것이고, 섬암고택은 운강의 둘째 아들인 박재소가 분가하면서 건립한 것이다. 운남고택은 운강의 셋째 아들 박재충의 집이며 명중고택은 운강의 손자인 박래현이 별서로 건립한 건물이다. 이들은 대개 19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고졸한 멋은 적지만 당당하고 깨끗한 풍모에 담백한 멋이 있다. 금천교 천변에는 운강이 철종 7년에 세운 아름다운 만화정(萬和亭)이 있다. 정자 문 밖은 아름다운 버드나무 뜰이다.

2022121801000537600021765
옛날 세라믹 공장이 있었던 곳에 조성된 신지생태공원. 공장으로 인해 단절되었던 천변의 녹지를 되살리고 걷기는 물론 유모차나 휠체어도 다니기 좋은 공원으로 재탄생됐다. 36m의 공장 굴뚝을 세상에서 가장 큰 곰방대로 만들었다.
◆임당리 명포길 운림고택 가는 길

신지리에서 북쪽의 임당리로 가는 길은 명포길이다. 선암로가 동창천을 향해 휘어지는 선호슈퍼 앞에서 분기해 임당1리 마을회관 근처의 사거리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임당(林塘)은 숲과 깊은 소가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옛날에는 임당과 명포(明浦) 두 마을이 있었는데 1914년에 임당으로 병합되었다. 명포는 신작로가 생기기 전 동곡을 오가는 나룻배가 드나들던 포구였다고 한다. 신작로가 나면서 포구마을과 옛길은 기억에서 사라져갔지만 오늘날 그 이름은 길이 되었고 임당의 운림고택(雲林古宅)을 찾아오는 이들이 그 길을 이용한다.

명포길 끝 사거리에서 오른쪽 임당길로 들어선다. 마을회관 지나 오르다 왼쪽 임당2길로 들어서면 잠시 후 기와 얹은 돌담이 아주 길게 이어진다. 그리고 5칸 규모의 솟을대문이 나타나고 다시 담이 오래 이어진다. 이 커다란 집은 조선 후기 궁중 내시(內侍)로 정3품 통정대부에 올랐던 김일준(金馹俊)이 낙향하여 건립한 주택이다. 그래서 내시고택·김씨고택이라고도 불린다.

대문에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사랑채·안채·고방채로 이루어진 정침이 튼 'ㅁ'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사랑 마당의 좌우측에는 큰 사랑채와 사당이 각각 자리한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 규모에 엄청난 크기의 고방창고를 갖추고 있는데 건물과 담장으로 폐쇄되어 있으며 사랑채 옆의 작은 중문으로 드나들게 되어 있다. 운림고택은 대문에서 사랑마당을 거쳐 안마당으로 출입하는 중문까지 모든 통과 공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일반 사대부 저택보다 한층 더 엄격하게 내외 공간을 구분하고 출입을 관리하는 배치다.

1988년 3월 이집의 사당 마루 밑에서 폭 7㎝·길이 70㎝ 크기의 두루마리가 나왔다. '내시부 첨지 김병익 가세계'였다. 임진왜란 직전 청도에 들어온 내시 가문의 족보였다. 400여 년간 16대에 이르기까지 성이 다른 양자들 이름과 이들이 묻힌 곳이 적혀 있었다. 이 같은 가계의 부인들은 친정 부모의 사망 때만 바깥출입이 허용되는 등 극히 폐쇄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제야 사람들은 알게 됐다고 한다. 왜 사랑채가 저리 크고, 왜 안채는 그리도 폐쇄적인지를. 중사랑채 판벽의 눈높이에는 하트모양의 구멍이 세 개 뚫려 있다. 내시의 삶 그리고 그들 부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내시 제도는 1908년 대한제국 시대에 폐지됐다. 운림고택의 가계는 17대 김문선에 이르러 직첩(職牒)만 받고 내시 생활은 하지 않았으며 18대 이후에는 정상적인 부자(父子)관계가 이뤄져 가계를 이어오고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청도군지. 한국지명유래집.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청도문화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경북도문화재지정조사보고서
공동기획: 청도군

Warning: Invalid argument supplied for foreach() in /home/yeongnam/public_html/mobile/view.php on line 399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 인기기사

영남일보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