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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프랑스 엑상프로방스(下) 폴 세잔 영감의 안식처…그림 속 풍광을 걷다

2023-01-06

[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프랑스 엑상프로방스(下) 폴 세잔 영감의 안식처…그림 속 풍광을 걷다
세잔 아틀리에로 가는 언덕길.

미라보 거리 근처에는 세잔이 태어나고 자랐던 세잔의 집(Maison Cezanne)이 있다. 현재 개인 소유로 들어가 볼 수는 없지만, 모자 사업으로 성공한 뒤 은행까지 세운 부자 아버지 덕분에 세잔은 어릴 때부터 중심가의 부자 동네에 살았다. 어린 시절 학교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던 에밀 졸라도 자주 드나들었던 곳이다.

세잔의 가족이 40년 소유한 '자드부팡 별장'
'오렌지나무 정원' 등 작품의 배경이 된 장소
父 타계 후 상속받은 유산으로 지은 '아틀리에'
화구가방·외투 등 집안 곳곳 세잔의 숨결 남아
영원한 뮤즈 '생빅투아르산'도 눈 앞에 펼쳐져


세잔의 가족들이 40년 동안 소유했던 자드부팡(Jas de Bouffan) 별장도 세잔에게 예술적 영감을 제공했던 장소였다. 이곳은 세잔의 어린 시절 추억이 가득한 곳이다. 엑상프로방스 외곽의 시골에 지어졌던 18세기 저택인 이 별장은 세잔이 20대에 그린 작품이 가득하다. 그는 은행가였던 자신의 아버지에게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증명하고, 미술가가 되겠다는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이곳 거실 벽에 12개의 작품을 그렸다고 한다. 그 가운데 세 작품은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세잔이 프로방스에 머물 때면 항상 이곳에서 지냈기 때문에, 그는 스무 살이 되던 1859년에서 1899년까지 무려 40년 동안이나 이 저택에서 살았다. 따라서 이곳의 오렌지나무 정원이나 밤나무 산책로가 그의 작품에 곧잘 등장하곤 한다. 그는 별장 앞의 공원에 이젤을 놓고 농장, 연못, 마로니에 나무 등을 그리곤 했는데, 총 36점의 유화와 17점의 수채화를 남겼다. 아버지 사후 이 별장을 유산으로 받았지만, 세잔은 이 집을 팔고 새로 아틀리에를 마련했다.

그 아틀리에를 보러 도심에서 북쪽 언덕길로 방향을 잡았다. 사람들의 발길이 성글어지면서 햇살이 부드럽게 어깨에 내려앉는다. 세잔의 아틀리에로 가는 길이다. 언덕길을 걸으니 제법 숨이 차고 땀방울이 맺혔다. 다시 제법 가파른 언덕을 오르자 '세잔의 아틀리에(Atelier de Cezanne)'라고 새겨진 표지판이 보인다. 이 표지판이 없었으면 그냥 지나칠 정도로 소박한 집이었다. 작은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울창한 나무에 둘러싸인 2층 주택이 나타났다. 그가 죽기 전까지 그림을 그렸던 공간이다. 1층에는 관람객을 위한 아트숍과 세잔의 일생을 해설해주는 영상실이다. 나무 계단을 밟고 2층에 오르면 크지 않은 공간에 세잔의 자취가 그득하다.

[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프랑스 엑상프로방스(下) 폴 세잔 영감의 안식처…그림 속 풍광을 걷다
세잔이 그린 '생빅투아르산'.

1902년부터 생을 마감한 1906년까지, 그는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햇살이 한가득 들어오는 이 작은 방에서 매일같이 작업에 몰두했다. 은행가가 되길 원했던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화가의 길을 선택한 그의 젊은 시절은 궁핍했다. 혹여 아버지의 심기를 해쳐 생활비가 끊어질까 늘 전전긍긍했으며, 아이가 있다는 사실도 오래 숨겨야 했다. 이 아틀리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상속받은 유산으로 세잔이 직접 설계한 건물이다. 북쪽에 커다란 통유리창을 설치했고, 바로 옆은 1894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대작 '목욕하는 여인들'의 캔버스를 들여놓기 위해 상하로 길고 좁은 통로를 만들어 문을 달았다. 여기다 남쪽으로 두 개의 창문을 더 내어 자연광이 실내에 들어오도록 했다.

작업실 모서리에는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였던 정물과 석고, 이젤과 기다란 작업용 사다리가 놓여 있다. 세잔이 입었던 물감 묻은 작업복과 외투가 걸려 있으며 야외스케치를 나설 때 챙겼을 모자와 화구가 담긴 가방도 눈에 띈다. 잠깐 외출한 듯 평소 생활 공간 그대로이다. 눈가는 데마다 보이는 세잔의 손길이 느껴져 지금도 작업 중인 아틀리에 같았다.

[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프랑스 엑상프로방스(下) 폴 세잔 영감의 안식처…그림 속 풍광을 걷다
세잔 아틀리에 2층 작업실 내부 모습.

아틀리에 밖에는 정원과 연결된 산책코스가 있었다. 세잔이 수없이 걸었을 작은 숲길을 거닐었다. 명상에 잠겨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는 세잔의 잔영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숲에서 애증이 겹쳤던 절친 에밀 졸라의 사망 소식을 접했을 때 그가 겪었을 고독과 슬픔도 상상해보았다. '이 작업실은 미술관이 아니다. 세잔 이외의 다른 것을 찾으러 오지 말 것'이라는 안내문처럼 이 공간은 그림에 일생을 바쳤던 한 예술가의 생활 그 자체였다.

아틀리에를 나와 10분 정도 더 언덕을 오르면 세잔이 생빅투아르산을 수없이 그렸던 '화가들의 땅(Terrain des peintres)'이 나온다. 이곳에는 세잔의 산 그림 연작 패널이 전시되어 있다. 그는 늘 이곳에 이젤을 펴고 눈 앞에 펼쳐진 생빅투아르산을 캔버스에 담았다. 이 산은 세잔의 영원한 뮤즈였다. 세잔은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에밀 졸라와 장 바티스탕 바유 등과 함께 이 산을 오르내렸고, 화가가 되어서는 유화 44점과 수채화 43점을 남겼다. 그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산의 모습에 빠져들었다.

[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프랑스 엑상프로방스(下) 폴 세잔 영감의 안식처…그림 속 풍광을 걷다
권응상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생빅투아르산 근처 솔밭에 숨겨져 있는 비베뮈스(Bibemus) 채석장도 세잔의 그림에 자주 등장한 장소이다. 세잔은 이곳의 다양한 황갈색 흙과 입체적 선에서 많은 영감을 받아 30여 점의 유화와 수채화를 완성하기도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906년 10월15일, 이 언덕에서 그림을 그리던 세잔은 급작스러운 폭풍우로 자리를 떠야 했고, 그것이 생빅투아르산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세잔의 예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두 사람을 들자면 친구 에밀 졸라와 화가 카미유 피사로일 것이다. 10살 무렵 세인트조셉 학교에서 그림을 배운 세잔은 14살 때 부르봉 학교에 입학했고, 여기서 에밀 졸라를 만나게 된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파리 말씨에 근시안인 데다 늘 어색한 태도로 말을 더듬기까지 하는 졸라는 친구들의 조롱과 야유를 받곤 했다. 그때마다 세잔이 그를 보호해주고 너그럽게 감싸주었다. 이런 친절에 감사하는 뜻에서 어느 날 졸라가 사과 한 바구니를 들고 세잔의 집을 찾아갔다. 그들의 우정은 이 사과 바구니와 함께 시작된 것이다. 이후 세잔과 졸라는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30여 년간 우정을 나누며 예술을 논했다.

사과는 이러한 면에서 세잔에게 개인적인 추억뿐만 아니라 졸라와의 각별한 우정이 담긴 상징적 의미를 내포한다. 세잔은 에밀 졸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사과 한 개로 파리를 놀라게 하고 싶다"라고 했다. 실제로 세잔은 200여 점에 달하는 작품을 통하여 사과의 형태와 색채를 탐구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그림은 세상을 놀라게 했고, 세상을 바꾼 세 개의 사과 가운데 하나라는 평을 듣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에밀 졸라가 세잔에게 내밀었던 사과 한 바구니에서 비롯되었다면 지나친 천착이겠지만, 적어도 세잔의 예술 인생에 에밀 졸라가 큰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에밀 졸라도 마찬가지였다.

에밀 졸라는 '나의 벗 폴에게'라는 시에서 '추억을 가진 이들은 행복하니/ 폴, 자네가 나의 청춘이네/ 돌아보면 내 즐거움과 슬픔 하나하나에// 자네가 함께하고 있어/ 오직 자네를 위해 이 글을 쓰네'라고 노래했다. 에밀 졸라는 어릴 때부터 언제나 자신을 지지하고 지켜준 친구 세잔에게 이처럼 절절한 고백을 했던 것이다.

에밀 졸라는 '테레즈 라캥' '목로주점' '나나'와 같은 세계적 명작의 저자이자 '드레퓌스 사건'을 고발한 것으로도 유명한 '행동하는 지성'이었다. 다니엘르 톰슨 감독이 연출한 영화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2015)은 두 사람의 우정과 애증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10대 시절 같은 학교에 다니며 친해진 세잔과 졸라는 서로의 그림과 글을 경외했다. 둘은 함께 엑상프로방스의 시골을 산책하고 그림을 그리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세잔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엑상프로방스를 떠나 파리로 갈 수 있었던 것도 졸라의 격려 덕분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우정은 1886년 에밀 졸라가 소설 '작품'을 출간하면서 깨지고 말았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클로드 랑티에는 늘 불안해하고 성적으로 자신이 없으며 실패한 화가로, 끝내 자살을 하고 만다. 세잔은 랑티에가 자신을 풍자한 인물이라고 생각했고, 수십 년 동안 친구에게 털어놓은 비밀들이 우롱당한 것처럼 느껴졌다. 에밀 졸라가 여러 화가의 특성을 섞어 놓은 허구적 인물이라고 해명했지만, 이 소설로 인해 둘의 30년 우정은 끝나 버렸다. 결별을 선언한 후 세잔과 졸라는 더 이상 만나지 않았지만, 에밀 졸라가 죽었을 때 세잔은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비록 두 사람의 우정은 말년에 어긋났지만 30년 동안 서로 주고받은 그 영감과 예술 논쟁은 위대한 두 예술가를 만든 원동력이라 할 것이다.

세잔을 독보적인 화가로 만든 한 사람을 꼽자면 단연 카미유 피사로라 할 것이다. 천부적 재능은 타고나지 못하여 늘 좌절했던 세잔은 1870년대 들어 오베르쉬르우아즈에 정착하여 피사로에게서 인상주의 기법 및 이론을 배우면서 자신만의 화풍을 확립하게 되었다. 세잔은 자신의 예민한 성격을 받아주며 오랜 세월을 함께 한 피사로를 '신이자 아버지'라고 언급하기도 했고, 자신을 피사로의 학생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세잔은 피사로에게 인상주의 기법을 배웠지만, 순간적인 빛의 변화를 포착하고자 했던 인상파와 달리 빛의 변하지 않는 부분에 더욱 집중하면서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었던 것이다. 입체주의를 창시한 거장 피카소는 세잔을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이처럼 엑상프로방스는 폴 세잔과 에밀 졸라라는 불세출의 예술가를 길러냈다.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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