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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진의 몸짓 이야기] 욕망의 몸짓 '야만'을 이겨낼 은은한 움직임 '예술'

2023-01-06

[조성진의 몸짓 이야기] 욕망의 몸짓 야만을 이겨낼 은은한 움직임 예술
현대는 숱한 야망의 가면을 쓰고 있다. 분노가 가득한 사람을 안아주어 난동을 멈추는 것이 예술이다. 그에게 분노가 쌓인 이유는 그를 아무도 안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야만이 그르렁댄다. 모 기독교계 신문 타이틀이다. 대구 북구 대현동 엽기 돼지 바비큐 파티, 개신교 교회 개입했다?


물음표는 내가 붙였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다. 기독교는 우리나라에서 서구 문명을 상징하는 종교다. 한때 기독교인이라면 개화된 문화를 접한 문명인이라는 관념이 있었다. 그런 문명의 옷을 입은 종교가 혐오를 조장하는 이런 야만적인 방식의 이벤트를 주도하다니? 상상하기 힘든 그림이다. 지구상의 기독교인이 23억명이라면 이슬람은 19억명에 이른다. 그러니 이슬람은 기독교만큼이나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비슷한 정도의 영향력을 지닌 종교가 금기시하는 음식을 일부러 먹으며 조롱하는 행위는 얼마나 무모한가? 그 몸짓의 성격은 야만이다. 대화와 타협, 공정한 경쟁을 기초로 하는 문명사회의 덕목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몸짓이 아닌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겉으로는 종교 간의 갈등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종교의 옷을 입은 욕망의 춤이다. 과거 기독교인은 영어도 잘하고, 서구문화에 밝으며, 유학을 다녀온 사람도 많았다. 이 유식하고 멋있는 사람들이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엘리트 집단을 형성했다. 힘 있는 사람이나 돈 있는 사람들 모두 이 그룹의 능력과 축복이 필요했다. 기독교의 가르침과는 관계없이 서로의 이해관계로 우호적인 연을 맺으며 한국사회의 주류를 형성했다. 기득권의 그물이다. 우아한 몸짓을 하는 사람들 그 연기 뒤편에 벌거벗은 욕망의 몸짓, 곧 야만이 그르렁댄다.

이성적 훈계는 뻔뻔한 사회를 이길 수 없어
분노가 차오른 사람을 안아주는 것이 '예술'
인간화된 욕망으로 만인의 공감 이끌어내야
'풍요'는 다양한 시도 할 수 있는 여백이 돼야


◆뻔뻔함이 지배하는 사회

그들이 주류를 형성했던 60~70년대 산업사회 기간에는 위선의 분 냄새가 가득했다. 위선은 당시 주류를 형성했던 사람들의 부조리를 표현하는 키워드였다. 뒤로 호박씨를 깐다는 말이 유행했다. 위선을 다른 말로 하면 대놓고 나쁜 짓을 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한편은 그 정도로 도덕적인 관념이 유지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묻지 마 범죄가 시작되었다는 때쯤일까? 혹은 대한민국이 너무도 빨리 샴페인을 터뜨린다는 평을 들을 때부터인가? 아마도 그때쯤부터일 것이다. 유사 이래 처음 경험하는 물질적인 풍요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사회의 시작이다. 그 요체는 뻔뻔함이다. 철학자 이진경은 현재 우리 사회를 '뻔뻔함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규정하고, 사회 일반을 관통하는 전반적 정서나 행동에 뻔뻔함이 만연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대놓고 나쁜 짓을 한다는 말이다. 벌거벗은 몸짓, 곧 야만이다.

야만은 인간의 몸의 다른 말일지도 모른다. 그 신문 기사 덕분에 망치를 든 힘센 남자가 등장하는 북유럽 신화에 관심 갖게 되었다. 거기에서 야만은 인간의 생명력이고 바탕이다. 따뜻한 그리스나 로마의 신화가 일하고 남는 시간에나 생각할 사랑이나 운명, 인생의 비극에 관심이 있다면, 북유럽신화는 추운 지방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생존 싸움의 냄새가 짙다. 넷플릭스에는 바이킹을 다룬 콘텐츠가 많다. 우리의 문화적 시선에서 영화 속 전쟁의 장면에 등장하는 그들은 거의 동물에 가깝다. 그들의 싸움에선 최소한의 룰이 없다. 다 죽인다. 아직도 역하게 남아 있는 그 영화의 장면이 측은함과 함께 그 신문 기사에 함께 실린 돼지 바비큐 사진과 겹친다.

[조성진의 몸짓 이야기] 욕망의 몸짓 야만을 이겨낼 은은한 움직임 예술
풍요는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볼 수 있는 여백으로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놀이정신'이다. 야만은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불이다. 오늘날 그 불을 실제의 세계를 향해 그대로 분출하는 것은 자살행위다.

공격성과 폭력성은 아주 어린 유아에게도 발견된다. 청소년에게 연극을 지도하다 보면 자신의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 상황을 엉망으로 만드는 모습을 종종 본다. 어른이 된 나도 꿈속에서 그런 장면에 시달린다. 밤이면 자주 독공했던 이소룡의 절권도 몇 가지 동작을 해보며 실제로 사용할 일이 없음에 아쉬워하기도 한다. 그러니 거친 광야에서 생존의 싸움을 해야 했던 원시인 또는 고대 인류에게 이 야만이라는 몸짓은 큰 덕이었을 수도 있겠다. 야만은 그렇게 먹을 것 앞에서는 동물이 되고 적 앞에서는 곧바로 살상 무기가 되는 능력이 아니겠는가? 그런 강력한 기억과 특질이니만큼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불쑥 나오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겠다.

◆해볼 테면 해보라는 야만

'잔혹극'이라는 연극이론의 창시자인 앙또넹 아르또는 연극에서 문학적인 대사나 무대를 꾸미는 조명과 같은 요소들보다는 움직이는 몸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잔혹은 문명으로 감춰진 몸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는 의미다. 몸은 이성적이지도 도덕적이지도 않다. 몸은 잘 가꿔진 아파트가 아니다. 몸은 거친 광야와도 같다. 그것을 드러내어 그 야만성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몸은 위험하다. 동시에 그만큼 신비하다. 이 위험함과 신비함, 둘을 조화시킬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야만은 피 냄새를 맡고 내달리며 동족을 살해하기까지도 하지만 열정을 만들고, 사랑에 빠지고, 축제가 되며, 친구나 나라를 구하기도 하지 않는가?

야만은 이성을 순식간에 무너뜨린다. 그러므로 이 뻔뻔함의 시대에 야만은 진화된 야만으로 이겨야 한다. 야만이 알라딘 램프로부터 뛰쳐나온 지니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닐 때, 이성을 찾으라, 상식적으로 행동하라고 훈계하고 주문하는 것으로는 그 지니를 다시 램프 안으로 돌려보낼 수 없다. 정치적인 권력을 얻은 자는 그 권력을 믿고 무도한 짓을 드러내 놓고 반복한다. 힘이 있으면 막아보라는 식이다. 해볼 테면 해보라는 것. 그것이 이 시대 야만의 방식이다. 언론을 쥔 야만, 법을 등에 업은 야만, 돈으로 뭐든 해결하는 야만. 이 야만을 분노와 훈계로 이길 수 없다. 논리와 설득으로, 나의 정당성을 주장함으로 벌거벗은 욕망의 춤을 종료시킬 수 없다.

보다 인간화된 욕망, 보다 진화되고 발효된 야만이 필요하다. 은은하고 절묘하게 뿜어내고 폭발하는 멋진 야만으로 만인의 공감을 얻어내야 한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가 살아남은 이유는 언어의 능력에 있다고 말한다. 언어의 힘으로 날것의 야만을 조직된 질서의 힘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은 상징이 가진 힘이다. 화염병이나 짱돌이나 횃불은 은은한 촛불로 진화했다. 은은한 상징의 출현. 태극기 부대의 태극기 역시 상징이다. 저마다의 욕망을 상징으로 드러내는 것 그것은 진화다. 유럽의 광적인 축구 팬덤인 훌리건은 붉은악마의 등장으로 그 저열함이 드러나고, 섹스와 폭력과 금빛으로 화면을 채우던 할리우드 영화는 스필버그와 봉준호의 등장으로 머쓱해지지 않았나?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분노와 훈계만으로는 이 시대의 풍요를 향한 욕망을 먹고 출현한 야만을 이길 수 없다. 저마다의 은은하고 절묘한 움직임으로 멋있게. 나는 그것을 예술이라고 부른다.

[조성진의 몸짓 이야기] 욕망의 몸짓 야만을 이겨낼 은은한 움직임 예술

◆예술이 야만을 이기는 기술

더이상 예술을 극장이나 콘서트홀이나 갤러리에 격리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그동안 소수의 예술가들이 갈고닦아 온 예술이 삶의 기술이 되고, 누림의 기술이 되며, 싸움의 기술이 되어야 한다. 먹고사는 일이 예술이 되며, 생산과 소비가 예술이 되고, 서로 싸우는 일이 격조가 있는 그런 문화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제 우리의 삶은 너무도 복잡해졌다. 환경이 그렇고 관계가 그렇다. 세상은 과목별로 전공별로 전문가의 영역별로 나누어지거나 단순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시시각각 그 효용이 떨어지고, 도덕적인 기준이나 윤리적인 가치 또한 세대나 지역 또는 이해관계 따라 극명한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변화의 속도와 인간관계의 다양성이 만들어내는 복잡성은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나 기술 또는 종교적 신념만으로는 대응하기 어렵다.

이를테면 분노가 가득한 사람을 안아주어 난동을 멈추는 것이 예술이다. 그에게 분노가 쌓인 이유는 그를 아무도 안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르또가 말한 잔혹극 이론의 요체다. 그는 연극을 배우의 몸과 관객의 몸 사이에서 일어나는 '공간의 시(a poetry of space)'라고 부른다. 이성적으로 행동하라고 다그치거나 경찰에 신고하는 것 그 이전에, 몸과 몸 사이에 길이 있다. 몸은 언제든 야만으로 돌변할 수 있다. 그리고 몸은 당신의 손길에 양처럼 온순해질 수도 있다. 그렇게 미묘하고 예민한 몸을 이해하고 적절하게 행동하는 것. 이를테면 그와 같은 삶의 기술을 예술이라고 부르자는 것이다. 그런 기술이 예술가에 의해 신비화되거나 독점되지 않으려면 예술가의 경험이 인문학에 의하여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공유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 놀이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놀이를 잃어버렸다. 왜냐하면 현실이라는 놈에 가위눌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대였다. 놀이는 복잡성에도 야만에도 통하는 길이다. 풍요의 시대를 맞아 내 것을 더 가지려는 욕망에 사로잡히면 심각한 삶을 살게 된다. 풍요는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볼 수 있는 여백으로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놀이정신'이다. 야만은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불이다. 오늘날 그 불을 실제의 세계를 향해 그대로 분출하는 것은 자살행위다. 그것을 일정한 놀이의 룰을 통해 분출하면, 실제의 세계에조차 매우 효과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촛불시위나 붉은악마가 한편으로는 놀이처럼 보이지만 실제의 힘을 갖기도 하는 것처럼. 문제 해결을 위해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것. 누군가는 '놀고 있네'라고 타박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창의적인 길을 찾아내게 한다. 그러니 이 야만의 세월에 너무 분노하지 말고 큰 소리로 가르치려 들지도 말고, 좀 놀고 있자. 한 예술 하자. <마임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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