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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더 나은 세상] 인연

2023-01-12

1999년 발생 '황산테러사건'
살인죄의 공소시효 폐지한
'태완이법'으로 국회 통과
변호사되어 집필한 책에서
특별한 사건·인연으로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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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진 변호사

사람들 사이뿐만 아니라 사건에도 인연이 있는 것 같은데, 이른바 '대구 어린이 황산테러 사건'이 내게 그런 사건이다. 1999년 5월 대구 효목동의 어느 골목길에서 신원미상의 남자가 지나가던 여섯 살 어린이에게 황산을 들이붓고는 사라졌다. 피부에 닿으면 몹시 위험한 화학물질은 아이의 두 눈과 입 안, 식도를 태우고 장기까지 손상시켰고, 결국 아이를 숨지게 했다. 지방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에 전국의 관심이 쏠렸고, 대규모 수사본부가 차려졌지만 경찰은 끝내 범인이 누구인지 찾지 못했다.

'태완이'라는 아이 이름이 알려진 건 사건 발생일로부터 16년이나 지나서였다. 상상도 못 할 일로 아이를 잃은 부모는 누가 무슨 이유로 아이에게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 밝혀 달라고 호소를 했다. 이에 마음이 움직인 사람들이 태완이 어머니와 함께 살인죄에 공소시효를 없애는 형사소송법 개정운동을 벌여서 2015년 7월 마침내 개정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였다. 개정 형사소송법은 아이 이름을 따 '태완이법'이라고 불렀는데, 안타깝게도 그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가 완성된 후여서 정작 태완이 사건은 태완이법 적용을 받지 못했다.

사건 당시 나는 신문기자였지만 사회부 소속은 아니어서 취재단 끄트머리에도 끼어보지 못했다. 법이 통과될 당시 나는 변호사였지만 그 법 개정에 조금도 관여한 바가 없다. 다만 사건 당시 동기 기자들이 동부경찰서에 차려진 수사본부를 분주히 오가며 취재하는 것을 본 기억이 선명해 법이 통과되었다는 뉴스를 조금 관심 있게 보았을 뿐이다. 그렇게 별 인연이 없었던 사건을 두 번이나 내 책에 쓰게 되었으니 아무 인연 없던 사건이 특별한 인연이 된 셈이다.

처음은 변호사가 되어 쓴 첫 책 '변론을 시작하겠습니다'에서였다. '장발장법'이라 불리던 상습절도범 가중처벌 조항에 얽힌 내 변론 이야기를 '태완이법' 인연에 빗대어 풀었는데, 그 꼭지를 어떤 편집자가 읽고는 법이 되어 우리 곁에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은 책에 대한 집필 제안을 해 왔다.

책('이름이 법이 될 때'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을 쓰면서 20여 년 전 사건이 일어난 곳을 가보았다.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하는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곳은 별로 바뀐 게 없어 그 골목길만은 마치 세월이 정지된 것 같았다. 반면 아들 이름을 딴 법이 만들어졌지만 정작 아들의 억울함은 풀지 못한 태완이 엄마는 젊은 아이 엄마가 아니라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연세가 되셨다. 책이 나온 직후 책을 보내드리겠다고 다시 연락드렸더니 서점에서 사보겠다고, 그게 옳다고 고집을 피우시고는 며칠 뒤에 사서 읽은 책 소감을 문자로 보내주셨다. "보다 더 많은 분께 이름이 법으로 명명된 사연들이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세상의 나쁜 일은 타인에게만 일어나는, 남의 일이 아닌 언제든 나의, 우리 가족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인식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 문자 하나에 책 쓸 때 한 고생이 다 녹았다.

별 인연이 없는 사건이 특별한 사건이 될 수도 있다. 삶이 신비로운 이유는 언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정혜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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