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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새마을운동 지도자들이 포항·경주 등 태풍 힌남노 피해 지역을 중심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새마을운동 중앙회 페이스북 캡처) |
주민에 의한 최초의 국민운동
직능단체 확산되며 선진국 발판
절대빈곤 탈출 목표 달성했지만
관료화돼 자발성 떨어지자 쇠퇴
새마을정신 개도국 전파'세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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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서울 잠실운동장에서 전국 새마을지도자 대회가 열리고 있다. (새마을운동 중앙회 페이스북 캡처) |
유상오 전 서울주택도시공사(SH) 미래전략실장은 자신의 저서 '국가재테크'에서 한국형 국가재테크 전개 과정을 다섯 단계로 나눈다.
1단계는 한국형 국가재테크가 시작돼 그 기반을 마련하던 1970~1973년의 기반 조성 단계다. 2단계는 조직과 사업을 점차 확대하던 1974~1976년 사업 확산 단계다.
3단계는 한국형 국가재테크의 효과를 깊이 있게 뿌리내리던 1977~1979년 효과 심화 단계다. 4단계는 체제와 활동 등을 민간 주도로 재정비했던 1980~1988년 체제 정비 단계다. 5단계는 자립과 자율 기반을 강화한 1989년 이후다.
◆마을 단위 주민에 의한 최초 국민운동
1970년 12월부터 정부는 전국 3만3천267개의 마을을 대상으로 마을마다 335포대의 시멘트를 무상으로 지원했다. 이를 통해 마을별로 필요한 사업을 추진, 생활환경 개선을 통한 마을 가꾸기 사업을 전개했다.
이때 마을마다 남녀 지도자를 각각 1명씩 선출해 이들을 중심으로 주민과 함께 사업을 계획하고 추진했다. 유 전 실장은 "민주적인 방법으로 지도자를 선출하고 그 지도력을 중심으로 주민을 뭉치게 한 것이 성공의 큰 원인"이라며 "마을 단위에서 주민이 스스로 결정해 추진된 최초의 국민운동이란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마을 단위로 시멘트 335포대를 나눠 주고, 지도자를 마을에서 뽑아 스스로 하고 싶은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따라 각 마을에서는 밤샘 토론을 통해 자신들에게 필요하면서도 하고 싶은 일을 결정해 추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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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부터 1976년까지는 한국형 재테크가 도약한 시기다. 유 전 실장은 이를 '한국형 재테크의 실체인 새마을운동의 자조정신'이 활성화된 시기로 정의한다.
이 기간 한국형 재테크의 활동이 지역에서 도시로 그리고 농장에서 공장으로 확산하며 경제엔 활력이 붙었다. 새마을운동이 농촌뿐만 아니라 도시와 각종 직능단체로까지 확대되면서 달러의 수출 증대와 외화 획득에 큰 역할을 했다.
정부는 전국에 설치된 새마을연수원을 통해 공직자와 사회지도층 및 일반 국민에게까지 교육 기회를 확대하고 지도자들의 자질과 능력을 함양했다.
1973년 375달러이던 1인당 평균 국민 총생산이 1976년 765달러로 2배 이상 증가했다. 1970년대의 중화학산업의 기틀이 완성된 것도 새마을운동의 역할이 컸다.
유 전 실장은 "마을이나 자신의 물건을 소중히 생각하고 절약과 근검을 생활화하기 시작했다"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생각이 본격 퍼지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때가 한국 사회 선진화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시기라고 판단한다"고 했다.
◆한국형 국가재테크의 심화
1977~1979년은 한국형 국가재테크의 자립 효과가 심화되는 단계다. 1977년 국민소득 1천달러라는 '절대 빈곤 탈출 목표'가 달성됐다. 사업 규모도 변하기 시작했다.
마을 단위 소규모 사업에서 지역공동체로 사업 규모가 확대되고, 도시와 지역을 연계해 한국형 국가재테크의 광역화를 도모했다. 더불어 도농 일체화란 구상을 갖게 됐다.
농촌지역의 주력 사업은 소득 증대와 문화·복지 시설 확충으로, 산촌 지역에서는 축산과 특용 작물 재배를 장려하면서 농공 단지 조성과 새마을공장 건설로 농외소득을 높였다.
도시의 경우 시민 참여형 환경 미화와 공장에서의 물자절약·생산성 향상 및 노사관계 건전화를 추진했다. 그 결과 국민 1인당 평균 총생산은 1976년 765달러에서 1979년 1천394달러로 2배 향상됐다.
유 전 실장은 "우리나라가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중요한 시기"라며 "한국형 국가재테크 안에서 성공한 사람의 특징을 보면 지역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고 허세를 부리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으며 사치를 하지 않는 특징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국가와 국민 간 일체화 깨져
1980년부터 1988년까지 준정부·관료 조직이 모든 사업을 추진했다. 그 결과 사업이 전국적으로 획일화되면서 국민의 자발성이 떨어졌다. 관 주도의 사업은 지역별 동기 유발이나 사업 연구가 부족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사업보다는 외관에 치중하는 사업이 많았다.
1980년 12월엔 사단법인 새마을운동중앙본부가 창립돼 전국을 대상으로 한 새마을운동이 본격 전개됐다. 다만 운영의 비대화와 정권을 위한 도구로 활용됐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1970년대 국가재테크가 국민과 국가의 공생하는 기반을 가진 반면 1980년대 국가재테크는 국가만을 위한 재테크였다고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전경환 관련 비리가 발생하는 등 1970년대 국민적 화합을 이끌어 낸 새마을운동과 거리가 멀어졌다.
유 전 실장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형 국가재테크인 새마을운동은 국가와 국민 간 일체화가 깨지기 시작했다"며 "이에 따라 국가가 국민을 지원하고 국민이 국가를 믿고 따르는 형태가 아닌 국민 스스로 재테크를 알아서 하는 체제로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했다"고 비판했다.
◆새마을운동, 1989년 이후 침체
1988년 제6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이른바 '새마을 비리'가 폭로됐다. 이로 인해 새마을운동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따라서 1990년대는 새마을운동의 침체기라고 할 수 있다. 대신 카드사·은행·증권사·보험사에서 부자 마케팅을 시작했고, IMF 이후 본격적으로 시장을 선도한다.
이런 가운데 한국형 재테크인 새마을운동은 사회 질서 확립 운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했다. 1997년에는 IMF 사태를 전후해 새마을운동 중앙회를 포함하는 여러 단체 주도로 '경제 살리기 국민 저축 운동' '나라 사랑 금 모으기 운동'을 주도했고 2000년대 들어선 새마을운동을 다른 개도국으로 전파하는 세계화에 매진하게 된다.
유 전 실장은 "1989년 이후는 새마을운동의 침체기라고 할 수 있다"며 "새마을운동의 근저에 있는 국가재테크는 서서히 침몰하고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됐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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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김건희 여사가 부산의 대학새마을동아리 회원들과 함께 생필품을 포장한 후 쪽방촌에 거주하는 어르신 댁을 방문해 전달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
2000년대 국가재테크에서 가장 아쉬운 것은 1997년 금 모으기로 뭉친 국민 통합의 저력을 살려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때 보여준 국민 통합의 저력을 활용해 국가와 국민이 잘살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고 국제화·세계화에 적합한 형태로 새마을운동을 업그레이드하는 노력이 있어야 했다.
유 전 실장은 "2000년대는 새마을운동의 몰락과 더불어 국가재테크의 의미를 상실한 시기"라며 "마을 단위 새마을운동의 동력과 방법론이 없는 상태에서 정부는 1990년대 우루과이라운드 이후 2010년까지 200조원을 지원했지만, 농촌은 과거보다 점점 못살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1989년 이래 농촌 평균 소득은 단 한 번도 도시 평균 소득을 넘어선 적이 없다. 국가 간 FTA는 첨단산업과 공업품에는 유리하지만 농촌 주민에겐 고난일 뿐이다.
유 전 실장은 "새마을운동의 실체는 정신이고 그 본질은 국가재테크"라며 "도시는 개인 재테크에 의존하고 있지만 국가적 구심점이 사라진 지금 개인의 재테크도 혼란만 가중되고 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새마을운동을 통한 국가재테크는 20세기 최대의 업적이다. 이제 다시 국가재테크를 살려 2030년 G5 국가 진입과 4만달러를 향한 도약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경모기자 chosim34@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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