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말미를 주마. 시 한 편씩을 써 오너라."
김영랑의 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를 배운 날, 국어 선생님은 시 쓰기 숙제를 내주었다. 그날 이후 소년의 근심은 쌓여 갔다. 시라고는 써 본 적이 없었다. 걱정은 내내 명치에 걸린 듯 툭툭 가슴을 짓눌렀다.
다시 자갈자갈 발밑이 울었다. 범어천을 걷던 소년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가만히 서서 자신에게 집중했다. 생각에 생각을 보탰다. 느낌에 느낌을 얹어가며 몰두했다. 곧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들이 자갈자갈 소리를 내며 쏟아졌다.
'나는 왜 세상에 태어났을까' '우리 집은 왜 가난할까' '아! 가난. 낯선 가난. 누구의 탓일까'.
소년은 문득 숨어버리고 싶었다. 자갈밭에 선 자신의 모습이 마치 길가에 버려진 죽은 나무작대기처럼 하찮게 보였다. 소년은 슬퍼졌다. 슬픔을 떠나보내는 방법을 따로 알고 있지도 않았다. 그 슬픔을 끌어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슬픔은 또 다른 슬픔을 몰고 왔다. 그제서야 '슬픔이 눈물이 아니라 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날 밤, 소년은 꾸역꾸역 시 한 편을 완성했다. 제목은 '자갈밭에서'였다.
"다들 숙제 해 왔나?" "네."
소년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럼, 일어나서 한번 읽어 보거라."
소년은 떨리는 목소리로 시를 읽어나갔다. 힘겹게 시를 발표한 후 자리에 앉자 선생님은 조용히 소년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열심히 노력하면 훌륭한 시인이 될 수 있겠구나."
그날, 소년은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2023년 3월31일, 소년의 이름을 내건 문학관이 대구 수성구 범어천 변에 들어섰다. '정호승문학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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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은 대구가 시인의 도시이면서 문학관의 도시로 거듭나길 기대했다. 특히 '정호승문학관' 개관을 계기로 한국시단에 자리매김한 대구 시인들의 문학관이 더 많이 들어서길 바랐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한평생 제 이름을 내건 문학관이 생길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너무 감사하고 신의 큰 선물이고 신의 큰 축복이라고 여깁니다."
지난 12일 영남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정호승 시인은 연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의 이름을 내건 '정호승문학관'은 옛 범어3동 행정복지센터를 리모델링해 들어섰다.
경남 하동에서 태어난 시인은 초등학교 1학년 때 대구로 이사를 왔다. 은행원이었던 아버지가 외지에 있다가 고향 대구로 발령을 받으면서다. 동네 주민들은 소년 호승이 살던 그 집을 '은행집'이라고 불렀다. 고무신을 신고 범어천을 따라 삼덕초등, 계성중, 대륜고를 다녔다.
"문학관 맞은편에 어릴 때 살던 옛집이 있었습니다. 지금 문학관이 들어선 자리는 배추밭이었고요. 겨울이 되면 배추밭은 더할 나위 없는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연날리기며 쥐불놀이, 딱지치기를 하며 하루를 보내곤 했죠. '호승아 밥 먹어라'며 어머니가 부를 때까지요. 어릴 때 놀던 놀이터에 문학관에 들어선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합니다. 그래서 더욱 영광이고 의미 있고 감회가 남다릅니다."
정호승문학관 시민 영혼 안식처 기대
대구가 시인과 문학관의 도시로 변모땐
비교할 수 없는 문화자산 갖추게 될 것
시인은 앞으로 문학관이 '영혼의 안식처'가 되길 바랐다.
"시는 고통스러운 삶에 큰 위안이 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시를 쓰고 있기도 합니다. 문학관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큰 힘이 되고 위안을 줄 수 있는 영혼의 휴식처가 되길 바랍니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문학관을 찾아 사색하고 시집을 보면서 위로와 위안을 받았으면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정호승문학관을 계기로 대구에 더 많은 문학관이 들어서길 희망했다.
"대구는 문향이면서 시인의 도시입니다. 6·25전쟁 당시에는 수많은 문인이 대구에 모여 작품활동을 이어갔고, 우리나라 최초의 시비인 이상화 시비도 달성공원에 있습니다. 지금도 전국적인 인지도가 있는 대구 출신 시인들이 문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정호승문학관이 계기가 되어서 현대시 문학사에 자리매김한 대구 시인들의 문학관이 많이 조성되길 바랍니다. 한편으로는 문학관이 많이 생기는 것을 걱정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도서관이 많아진다고 해서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학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출판사들이 몰려들면서 파주가 독특한 특색을 지닌 도시가 된 것처럼 대구는 문학관이 많은 도시로 거듭나길 바랍니다. 특히 육체적인 배고픔이 해결되면 더 중요한 것을 찾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앞으로 인간은 정신적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문화적 양식을 찾을 것입니다. 그 양식을 채울 수 있는 곳이 바로 문학관입니다. 문학관이 바로 정신적 양식을 쌓아두는 곳간의 역할을 할 것입니다. 대구가 시인의 도시, 문학관의 도시로 거듭나는 순간, 대구는 비교할 수 없는 문화적 자산을 가지는 것입니다."
정호승 문학관이 들어서기까지는 사실상 우여곡절도 많았다. 시작은 2016년 그의 대표작 '수선화에게'가 새겨진 범어천의 '정호승 시비'부터였다. 당시 일부에서는 '이상화문학관도 없는 마당에 대구 출신도 아닌 시인의 시비가 말이 되느냐'며 비판을 쏟아냈다. 문학관 조성도 그 연장선에서 반대 의견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시인은 서운해하지 않았다. 되레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전국에 제 시비가 많습니다. 연락도 없이 세워진 시비도 있을 정도입니다. 심지어는 아파트 단지 내에도 있습니다. 지난해 김수환 추기경 탄생 100주년을 맞아 명동성당에 제 시비가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호승 시비가 아닙니다. 명동성당의 시비죠. 물론 제 시가 사용된 것은 사실이지만 저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범어천의 시비도 정호승의 시비이기 전에 범어천의 시비, 수성구의 시비, 대구의 시비입니다. 특히 문학관은 시가 흐르는 범어천 프로젝트 일환으로 조성됐습니다. 정호승보다는 장소적 의미가 큰 문학관입니다. 정호승문학관은 수성구민의 문학관이면서 대구시민의 문학관입니다. 이제는 범어천의 시인, 대구의 시인으로 인정해 주길 바랍니다."
앞으로 시를 너무 많이 쓰지 않을 것
양이 아니라 현재성 속에서 시를 쓰는
시인으로 사는 게 더 가치 있다고 생각
시인은 범어천에 대해 물을 때마다 "내 시의 고향이자 내 문학의 모성적 원천이었다"고 강조했다. "내 문학의 살과 뼈는 범어천에서 형성됐다"고 할 만큼 깊은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곳에서 시인의 꿈을 키웠고, 자연을 배우며 인간을 이해했다. 범어천 자갈밭에 버려져 있던 아기의 탯줄이며, 장대비가 내린 다음 날 떠내려오던 젊은 송장이며, 가마니에 덮인 채 발만 삐죽 빠져나와 있던 동사자를 보면서 때로는 죽음과 오그라드는 두려움을 배우기도 했다. 죽음의 임시처가 된 그 모습은 훗날 시가 되었다.
"비가 그친 뒤/ 강둑 위에서 제비꽃이 고개를 들고/ 강물을 내려다본다/ 젊은 송장 하나가 떠내려오다가/ 사랑한다/ 내 글씨에 걸려 떠내려가지 못한다"('사랑한다' 부분)
지난해 시인은 등단 5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해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를 펴내기도 했다. 시인은 시집에서 '살아갈 날보다 죽어갈 날이 더 많은'('택배' 중) 나이이지만 '시를 쓰는 고통'마저 기쁨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고 고백했다.
"저에게 시는 존재의 가치입니다. 등단 50년이 넘어 인생의 황혼 녘에 와있지만 돌이켜보면 '시인으로서 살아온 가치'가 가장 소중합니다. 저는 시를 통해 인간과 자연을 이해하려 하는 사람입니다. 그동안 시집을 열네 권 정도 냈는데 시집에 실린 시가 1천100여 편 정도 됩니다. 앞으로도 시를 계속 쓸 생각입니다. 하지만 너무 많이 쓰지는 않을 겁니다.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재성 속에서 시를 쓰는 시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내내 시인은 유년시절의 기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지금은 낯선 아파트와 빌딩들이 빼곡하게 들어섰지만 그때 그 시절의 모습을 지도 그리듯 그려냈다. '저 골목 맞은편에는 옥이네가 있었고, 친구 부모님이 염색공장을 하셨고….' 옛 추억을 끄집어내며 이야기를 이어가는 시인의 모습은 여전히 '범어천 자갈밭을 걷는 소년'처럼 보였다.
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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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운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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