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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진의 문학 향기] 가장 긴 날의 노을

2023-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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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진〈소설가〉

1907년 5월26일 미국 배우 존 웨인이 태어났다. 그의 출연작 중 가장 유명한 영화는 아마도 '지상 최대의 작전'일 것이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1944년 6월6일, 공간적 배경은 프랑스 서북부 노르망디 해안이다.

이날 연합군 17만명이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그 후에도 상륙작전은 계속되어 8월29일까지 100만 병력과 17만대 이상의 차량이 프랑스 땅에 올랐다. 역사에 없었던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은 사상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다.

독일 장군 롬멜은 상륙 작전의 성패가 24시간 안에 결판난다고 보았다. 그래서 "독일군에게든 연합군에게든 경험한 바 없는 가장 긴 하루가 될 것"이라고 했다. 원작 소설 작가 코닐리어스 라이언은 롬멜의 말에서 제목 'The longest day'를 따왔다.

'가장 긴 날'이 우리나라에서 '지상 최대의 작전'으로 변질되었다. 화이허강 남쪽의 귤(橘)을 강북으로 옮겨 심으면 탱자(枳)로 바뀐다(化)는 사자성어 귤화위지(橘化爲枳)도 있지만, '가장 긴 날'과 '지상 최대의 작전'은 뜻도 어감도 전혀 다르다.

문학과 철학이 깃들어 있는 '가장 긴 날'과 딴판으로 '지상 최대의 작전'은 무미건조한 개념어에 지나지 않는다. "왜 엉뚱한 제목으로 바꾸었소?" 하고 묻다가는 우문현답으로 조롱받으리라. 관객 유인에 유리하다는 판단이 낳은 개명이었을 터이므로.

영화 수입사는 우리나라 국민 수준을 '무식'으로 판단했던 듯하다. '지상 최대의 작전'은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배달겨레를 지나치게 낮춰본 개명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 제목에 현혹되어 엄청난 관중이 몰렸으니 딱히 추궁할 말도 없기는 하다.

1678년 프랑스 여류작가 마들렌 드 라파예트가 소설 '클레브 공작 부인'을 익명으로 발표했다. 여성이 소설가로 이름을 드러내면 해롭기만 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녀평등의 아름다운 시간을 못 본 채 타계했다. 이 눈물겨운 '시대와의 불화'를 '지상 최대의 작전' 노랫말로 너무도 단적으로 묘사했다.

"많은 남자들이 이곳에 군인으로 왔어/ 가장 긴 하루를 살면서/ 그들 중 상당수는 일몰을 보지 못하겠지…." 그런데 우리는 '가장 긴 날의 노을'은 못 보고 '지상 최대의 작전'만 보았다.

다음 세상에서 노르망디 병사들이 "노을을 보았느냐?"라고 물으면 우리는 할 말이 없겠다. 시대와의 불화도 아닌즉 개념화도 마땅하지 않다. 피천득 '인연' 식으로 엉뚱하게 마무리를 짓는 수밖에 없다. "오늘 침산 노을이 유난히 아름다울 것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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