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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문화산책] 쉼표를 잘 연주하는 연주자

2024-07-04

이선경
이선경 (이선경가곡연구소 대표)

지난주 또 하나의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2024 지나 바카우어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피아니스트 스물세 살 선율이 우승을 차지했다는 뉴스였다. 피아노, 성악, 현악 등 분야를 막론하고 세계 곳곳에 들려오는 젊은 한국인들의 뛰어난 활약에 대한 소식은 음악인으로서 더욱 기쁘고 자랑스럽다. 사실 국제콩쿠르는 예선 통과만도 낙타 바늘귀인 데다 상금이 크고 기회 부여가 큰 콩쿠르일수록 빡빡한 라운드에 준비해야 할 곡목이 많고 암보의 부담이 상당하다. 이 모두를 통과하여 우승을 차지한 K-Classic 젊은 음악인들은 정말로 기인이 아닌가 싶다.

한 번만 삐끗해도 감점이 되는 살벌한 콩쿠르 무대는 여타 공연과 너무도 다르다. 수상 소식에 반가움과 흐뭇함 이면에는 무대 뒤에 가려진 수많은 노력과 고통을 어찌 견뎌왔을까 하는 가여운 맘이 같이 올라온다.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 하라는데 순위를 매기는 무대는 심장이 턱밑에 있는 듯 그야말로 긴장이 끝까지 오른다. 이런 살벌함 속에 차분히 자신의 음악을 이끌고 연습처럼 실전을 해내는 내공은 도대체 그 어린 나이에 어디에서 배우고 쌓은 것인지 놀라울 지경이다.

음악은 자고로 일찍 시작해야 한다는 게 정설인데 여러 형편으로 어린 시절엔 음대를 진학하지 못했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비로소 음대에 진학했다. 너무 소원하였던 데다 다시 맞이한 학생이라는 기회가 너무 귀하고 지나는 시간이 애달파 잠을 이틀에 한 번씩 잤다. 과제, 연주, 아르바이트 등 해야 할 일들이 산적하여 잠을 제대로 못 잔 탓도 있지만 늦깎이 작곡과 학생이라 하루하루 무언가를 채워도 부족하다는 강박에 끝없이 나를 채찍질한 탓이다.

"쉼표를 잘 연주하는 연주자가 최고의 연주자야." 음대 재학 시절 전공 교수님께서 나의 레슨시간에 자주 하셨던 말씀인데 그때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쉼표는 소리를 내지 않는데 무슨 연주를 한다는 거지?' 하며 갸우뚱했는데 한참이 더 지난 지금, 이 말씀이 일상에서도 연주에서도 자꾸만 떠오른다.

어린 시절엔 음표들이 촘촘하고 손가락이 열 개인 게 맞나 싶을 만큼 화려하고 유려한 음악에 매몰되었는데 언젠가부터 듬성듬성한 음악에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다. 머리 희끗희끗한 연주자가 꾸미지 않은 듯한 모습에 느린 걸음으로 무대에 나와 관객과 마주하는 따뜻한 눈빛 그리고 첫 음을 들어가기에 앞서 자신의 호흡과 관객의 호흡을 일치시키는 적막을 아무렇지도 않게 견디는 그 내공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무대를 설 때마다 몸소 느낀다.

쉼표는 음표를 위해 양보하거나 희생하는 것이 아닌 엄연히 자기 자리와 길이를 가지고 있음을, 소리 내지 않는 순간이 있기에 소리가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선생님께 진즉 배웠건만 세월이 훌쩍 지나 이제야 선생님을 선생님으로 만난다.

'K-Classic'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할 만큼 세계 곳곳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젊은 한국음악인들이 성과라는 무게에 짓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삶에도 쉼표를 적절히 배분해서 음표가 더욱 빛나는 시간이 되기를, 그래서 오래오래 음악 안에서 행복하기를 전심으로 바란다.

이선경<이선경가곡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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