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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욱의 민초통신] 참 어려웠던 시절의 올림픽

2024-07-23

올림픽 등 국제경기를 통해
전국민 위로받던 그시절이
지금 하나도 그립지 않지만
여야 다툼만 자주 접해선가
올림픽 통해 위로받고싶다

[민병욱의 민초통신] 참 어려웠던 시절의 올림픽
민병욱 한국언론진흥재단 전 이사장

# '조선'의 선수로 참가

'KOREA'가 태극기를 앞세워 하계올림픽에 처음 참가한 건 1948년 영국 런던대회다. 당시 우리 이름은 '조선'. 대한민국 정부를 공식 수립해 명실상부 독립국이 되기 보름 전으로 미군정(美軍政) 치하였다. 웸블리 스타디움 개막식에 태극기를 든 기수 손기정을 앞세워 선수단이 입장하자 라디오 중계를 하던 서울중앙방송 민재호 아나운서는 감동을 못 이겨 흐느꼈다. "런던 하늘에 태극기, 선수들 앞에도 태극기, 이 넓은 스타디움에 눈물을 머금고 저 태극기를 바라보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태극기도 입이 있어 말을 한다면 우쭐거리고 춤을 추면서 파란 많은 지난날을 눈물로 독백하리라"(김광희 '여명:조선체육회, 그 세월과의 싸움' 2001)

조선이 런던대회에 참가하기까지 여정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이었다. 1948년 6월21일 기차로 서울역을 떠난 선수단은 근 20일 지구 반쪽을 누비고 7월11일 런던에 도착했다. 먼저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 후쿠오카로 갔고 다시 기차로 요코하마에 갔다. 이틀을 보낸 후 또 배를 타고 상하이(중국)를 거쳐 홍콩에 닿았다. 여기서는 비행기를 탔지만 여러 도시를 돌며 갈아타느라 공로(空路)에도 닷새가 걸렸다. 방콕(태국), 콜카타, 뭄바이(인도), 카이로(이집트), 로마(이탈리아), 암스테르담(네덜란드) 등 5개국 6개 도시를 지났고 서울부터 런던까지 치면 10개국 13개 도시를 거쳤다. 여비가 부족해 벌어진 일이었다.

67명 선수단이 런던에 가는데 계상한 1인당 여비는 2천달러. 양복비와 유니폼값 15만원은 그와 별도로 들었다. 당시 조선의 1인당 국민소득은 50달러가 채 안 될 때다. 군정청에서 배편을 주선하고 특별 경비도 댄다고 했으나 예상 총경비를 맞추는 건 어림없는 일이었다. 체육회는 궁리 끝에 한국 최초의 복권이 될 '올림픽 후원권'을 발매하기로 했다.

앞면에는 1947년 IOC(국제올림픽위원회) 가입을 위해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가다 숨진 전경무 조선체육회 부회장의 사진을 넣었다. 여비 부족으로 미군 수송기에 편승했다 추락사고로 숨진 그의 이야기는 국민에게 이미 영웅담으로 새겨져 있었다. 후원권의 액면가는 1백 원. 최고급 '공작' 담배 한 갑이 30원이었으니 싸지 않은데도 발행한 14만 장이 거의 다 팔렸다. 여기에 국극단 공연과 우표 발행 수입금, 국민 성금 등을 보태 선수단이 일단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국회는 성대히 환송식을 열어주었으나 의원들은 바로 이튿날 부족한 경비 4만달러를 영국으로 부쳐주자는 긴급 발의를 냈다.

# 전쟁 포화 속 올림픽

1952년 7월 핀란드 헬싱키 올림픽은 한국전쟁 한가운데에 열렸다. 5월에 거제도 포로수용소 사건이 일어났고 10월엔 백마고지 전투가 있었다. "이 참혹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라는 여론도 있었으나 대한체육회는 육상 권투 역도 등 개인경기에 최소한의 선수, 최소한의 경비로 참가한다는 원칙을 정했다. "전쟁으로 심신이 짓눌린 국민에게 국제스포츠 승리가 큰 위로가 될 것"이란 점도 작용했다. 국무회의는 35명 선수단 총비용을 11만5천달러로 잡고 그중 4만달러를 보조금으로 내기로 했다. 여기에 미 8군 및 유엔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이 두 차례에 걸쳐 1만4천달러를 기부하는 등 내외국 참전 군인들의 후원금도 도움이 됐다.

선수단은 6월12일 전쟁 중 임시수도 부산의 수영 비행장을 출발했다. 4년 전처럼 이번에도 지구 절반을 도는 여정이었다. 도쿄~홍콩~방콕~콜카타~카라치(파키스탄)~아바단(이란)~카이로~아테네(그리스)~로마~제네바(스위스)~헤이그(네덜란드)~오슬로(노르웨이)를 거쳐 헬싱키에 6월30일 도착했다. 런던 때건 헬싱키 때건 국민은 물론 해외 교민들의 성원은 눈물겨웠다. 특히 일본 재외 국민들은 선수 운동복에 양말 수건, 심지어는 영한사전까지 전하며 필승 또 필승을 기원했다. 런던대회 당시 선수단복이 겨울 옷감으로 만들어져 선수들이 고생했고 언어 문제로도 경기 운영에 애로를 겪었다는 보도를 본 교민들이 앞다퉈 선물을 준비한 것이었다.

1932년 36년 일제 강점기 올림픽 때도 재일본 교민들은 조선 선수를 돕는데 성심이었다. 32년 미국 LA 대회에는 권태하 등 조선 선수 3명이 참가했다. 이들은 미국행 우편선 갑판에서 달리기 등 훈련을 했고, 운동복과 수건 양말을 동포 선물로 충당했다. 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나가 한국인 최초로 금메달을 딴 손기정의 회고도 흥미롭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로 2주간을 달려 베를린에 갔는데 기차가 역에 설 때마다 플랫폼과 레일 위에서 걷기와 몸 펴기 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소련 측에서 "왜 뛰는 척 역과 철로의 길이를 재느냐, 스파이 짓 아니냐?"라고 항의하는 바람에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게다가 열차 내 온도가 35℃ 안팎으로 무더워 베를린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탈진해버렸다는 것이다.

# 위로받고 싶다

제33회 파리올림픽이 26일 오후(한국시간 27일 새벽) 막을 올린다. 한국선수단 본진은 지난주 파리에 도착, 퐁텐블로에 마련한 사전 훈련캠프에서 막바지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캠프엔 급식 지원 센터도 설치됐다. 진천 선수촌의 조리사·영양사들이 대거 동원돼 선수들 입맛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태극기를 단 우리 비행기에 처음으로 올림픽 선수단을 보낸 것이 56년 호주 멜버른대회다. 그리고 한국선수단만을 위한 급식 센터를 처음 운영한 것이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었다. 원조 기부에 기대어 겨우겨우 참가하고 그런데도 돈이 없어 온갖 교통수단의 2등 3등 칸에 실려 잠과 끼니를 거르고, 몸도 제대로 못 편 채 올림픽 경기장에 도착하던 옛 선수들에겐 참 꿈과 같은 얘기요, 상전벽해가 아닐 수 없다.

정부 수립기, 한국 전쟁기 등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에 비하면 요즘 한국의 형상은 무엇이든 보기가 좋다. 부유하고 자유로우며 또 공정하고 바른 세계 수준의 국가가 되었다고 내세우는 이도 많다. 자랑거리라곤 없던, 그래 올림픽 등 국제경기에 전 국민이 함께 마음을 바치고 위로받던 그 시절이 지금 하나도 그리울 건 없다. 다만 밥맛 떨어지는 대통령과 부인의 온갖 스캔들에 여야 정당의 졸렬한 다툼을 너무 자주 접해선가. 올림픽을 통해서라도… 위로받고 싶다.
민병욱 한국언론진흥재단 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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