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寒來暑往(한래서왕), 가을이 온다

박순진 대구대 총장

힘든 여름이 유난히 길다. 올여름은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맹렬한 무더위가 연일 이어졌다. 비가 오는 양상도 예전 같지 않다. 열대지역에서 보던 스콜처럼 많은 비가 순식간에 좁은 지역에 쏟아부어 여기저기 물난리가 났다. 바람도 여간 세게 부는 것이 아니다. 이런 극단적인 여름 날씨는 전에 없던 일이다. 10월이 목전인데 낮에는 아직 기온이 높고 태풍 소식도 여전하여 여름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이웃 나라에는 큰 태풍이 휩쓸고 지나가 피해가 엄청나다. 올여름은 마치 꼬리가 긴 짐승을 닮았다.

추석이 지나고도 맹위를 떨치는 날씨에 언제 가을이 오나 싶은데 어느새 아침저녁으로 찬 기운이 살짝 느껴지고 산책길에는 긴팔 옷을 입어도 어색하지 않다. 아무리 매서운 여름이어도 계절이 바뀌는 자연의 섭리는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한다. 저녁에 산책을 나섰다가 어릴 때 배웠던 한래서왕이라는 천자문 구절이 문득 떠올랐다. 차가운 기운이 몰려와서 무더운 여름을 몰아내는지 무더운 기운이 물러가서 선선한 가을이 오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가을이 온다니 반가운 마음 가득하다.

지난여름 우리를 힘들게 한 것은 날씨만이 아니다. 꽉 막히고 답답한 일들이 연이어 발생하고 여러 현안이 사회 전반을 짓누르면서 우리를 더 힘들고 지치게 하였다. 이해가 상충하는 집단 간의 소통은 막히고 갈등이 거의 전쟁 수준으로 치달았다. 분쟁을 조정하고 중재할 정치인과 관료가 되려 갈등을 부추기고 국가와 사회의 균열은 날로 확대되고 교착되니 탄식이 절도 나온다. 긴급한 현안을 앞두고 국가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의문이 들 지경이다. 국리민복은 오간 데 없고 죽고 사는 정쟁만 횡행하고 있다.

무더위가 길고 날씨 변덕이 심하면 가진 것 없는 서민이 힘들고 사회가 어수선하면 힘없는 국민의 삶이 여러모로 고달프다. 도회지에 살면 계절의 변화에 둔감하기가 십상이다. 냉난방 잘되는 아파트에서는 무더위와 폭풍우를 잘 모른다. 고급 차를 타고 어쩌다 지나치는 시골 풍경은 마냥 목가적으로 보인다. 저마다 국가와 사회에 헌신한다고 목소리 높이는 정치인과 관료는 넘쳐나는데 국가와 사회는 어지럽기 짝이 없고 서민들의 삶은 고달프기만 하다. 오히려 힘없는 국민이 국가와 사회를 더 걱정하는 세상이다.

무더위와 폭풍우가 심할 때면 문득 여러 짐승과 미물들이 그 힘든 상황을 어떻게 지나가는지 궁금해진다. 큰물이 들이치는 날에는 물고기들이 어떻게 홍수를 견디는지,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는 새들과 벌 나비가 어디서 비를 피하는지, 무더위가 극성인 날에는 야생 동물들이 무엇으로 더위를 이겨내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비가 그치면 벌과 나비가 다시 날아다니고 크고 작은 물고기가 다시 헤엄치는 것을 볼 때마다 절로 감탄이 나온다. 돌아보면 저마다의 방식으로 역경을 맞이하고 견디고 지나가고 있다.

이제 곧 선선한 가을이다. 맹렬한 무더위와 세찬 폭풍우를 겪으면서 여름을 힘들게 지나고 맞이하는 가을이라 올해 가을은 더 반갑게 맞이하고 싶다. 가을에는 실타래처럼 뒤엉킨 국가적, 사회적 난제가 하나씩 풀리고 해결되기를 희망해본다. 더울 때는 더위가 끝나기만을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좋은 계절은 짧고 빠르게 지나가니 아쉽다. 한래서왕(寒來暑往) 다음 구절은 추수동장(秋收冬藏)이다. 기다리던 가을이 되면 곧이어 추운 겨울이 다가온다. 가을을 맞으면서 곧 다가올 혹독한 긴 겨울도 준비해야 한다.박순진 대구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