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천·북천 만나는 곳에 버드나무 숲
이형상의 9곡 중 8곡 '사박협' 해당
'하근찬 징검다리' 숲~금노동 연결
소설 '수난이대' 떠올라 가슴 먹먹
성내동 폐철도 구간 도시숲도 운치
◆ 금호강이 시작되는 곳, 유정숲
유정숲. 이곳은 두 물줄기가 만나 금호강을 이루는 두물머리의 좁은 땅으로, 예부터 버드나무 숲이 울창해 버들숲이라 불렸다. |
영천 성내동(城內洞)은 지난 시대 성 안쪽의 서편 마을이다. 성내동의 서남쪽 모서리 땅 끝에 유정숲이 있다. 영천역으로 가는 대구선 철교와 북영천과 연결되는 중앙선 철교가 얽히고설킨 철길 삼각선 아래다. 금호강 푸른 표지판과 함께 나비바늘꽃이 서걱대는 강변을 따라가면 영천을 상징하는 마스코트 별찬이가 두 팔 벌려 맞이한다. 정자도 여럿이고 최근에 설치했다는 큼직한 전통그네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울창한 유정숲은 언젠가 세 그루만 남게 되었다는데 오늘날의 수양버들 숲은 근래에 조성한 덕인 듯하다. 은행나무도 있고 이팝나무도 있다.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는 저 노거수는 왕버들인가. 나무아래 제대 같은 판판한 돌이 놓여 있다. 이리보고 저리 보아도 당산목인데 정확한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유정숲의 오른쪽에는 신녕천과 고현천이 쌍계에서 만나 내려오는 북천이 흐른다. 숲의 왼쪽에는 고천천, 임고천, 자호천 등이 하나 된 남천이 흐른다. 그렇게 흘러온 둘은 유정의 고목 앞에서 합류해 금호라는 이름을 얻는다.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문인인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은 1700년 48세의 나이에 경주부윤을 마지막으로 영천 성고(城皐, 현 성내동)의 금호강변에 정자를 짓고 은거했다고 한다. 그는 금호강에 월선을 띄우고 풍류를 즐기며 구곡을 경영하였는데 그는 이곳 두물머리를 제8곡 사박협(沙搏峽)이라 했다. '팔곡이라 여기 저기 어디에나 밝은 빛 열렸고/ 크고 작은 봉우리 읍(揖)을 하듯 물을 따라 돌아오네.' 그의 시대에 이곳에는 모래밭이 평평하게 펼쳐져 있었던 모양이다.
앙상한 이팝나무 가슴에 '기룡지맥종착점' 이라 프린트 된 종이가 비닐 옷을 입고 펄럭인다. 낙동정맥에서 가지를 형성한 보현지맥은 다시 선암, 팔공, 기룡 세 개의 산줄기를 분기시키는데 그 가운데 기룡지맥이 여기서 끝난다는 뜻이다. '종착점' 종이를 가슴에 품고 한발 한발 마루금을 밟아 마침내 이곳에 도착한 어느 산꾼을 생각한다. 비바람에 상하지 않게 비닐을 입힌 마음과 노거수가 아닌 어린 나무를 택한 마음도 헤아려 본다. 그의 뿌듯한 표식 앞에서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읍하는 모습도 본다. 멀리 우뚝한 봉우리는 속골산과 채약산이다. 강 건너 오른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산줄기는 유봉지맥의 마지막 봉인 유봉산이다. 팔공지맥에서 분기한 유봉지맥의 산줄기도 이곳에서 맥을 다한다.
◆ 하근찬 징검다리
성내동 유정숲과 금노동을 연결하는 하근찬 징검다리. 이 길은 2021년에 만든 역사문화탐방로의 '근현대사의 길'에 속해 있다. |
남천 너머는 금노동이다. 유정숲에서 금노동을 연결하는 징검다리가 있는데 '하근찬 징검다리'라 불린다. 하근찬은 1931년 영천 금노동에서 태어난 소설가로 1957년 단편소설 '수난이대'로 등단했다. 제목만 들어도 가슴이 먹먹하다. 일제강점기 징용에 끌려가 한쪽 팔을 잃은 아버지가 고등어 한 손을 사들고 기차역에서 아들을 기다린다. 아들은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돌아오는 길이다. 도착한 아들은 한 쪽 다리가 없다.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앞장서 가는 아버지는 뒤따라오는 아들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둘은 외나무다리에 다다른다. 아버지는 아들을 업고 외나무다리를 건넌다. 업힌 아들의 손에서 고등어가 달랑거린다. 징검돌 틈을 빠져나가는 물소리 쟁쟁하다.
◆ 성내 철길 숲
폐철도 구간 유휴부지 중 성내동 구터 일원의 180m 구간, 연면적 3천200여㎡가 숲이 되었다. '성내 철길 숲'이다. |
유정숲 일대의 마을을 구터 또는 구태라 부른다. 오래전 북천 너머 오수동에 역(驛)이 생기자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역 주변으로 터전을 옮겼는데 이후 옛 마을을 구터라 불렀다 한다. 시간이 흘러 이 마을을 가로지르는 철길이 놓였다. 그리고 80여 년간 기차가 달렸다. 이후 철길은 대구선의 복선전철 사업으로 용도 폐지된 채 몇 년간 방치되었다고 한다. 지금 그 철길에는 꽃이 피고 나무가 자란다. 파고라와 평상이 꽃가지 속에 놓여 있고 그네 벤치가 산들바람 불 듯 흔들린다. 철길은 2022년 12월 도시숲 조성 공모에 선정됐고 폐철도 구간 유휴부지 중 성내동 구터 일원의 180m 구간, 연면적 3천200여㎡가 숲이 되었다. '성내 철길 숲'이다.
이곳에는 소나무, 은목서, 이팝나무, 팽나무 등 교목 14종 184주와 사철나무, 영산홍, 나무수국, 조팝나무, 장미 등 관목 9종 1천470주, 맥문동, 은사초, 억새 등 초화류 5종 5천930본 등이 식재되어 있다. 철길에 궤도와 침목은 없다. 자갈 깔린 도상의 흔적도 없다. 이곳이 철길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은 숲 양쪽으로 바짝 붙어선 집들의 바짝 엎드린 자세와 작디작은 창뿐이다. 작은 창가에 시래기가 말라간다. 손바닥만 한 텃밭에는 상투를 튼 조막만 한 배추들이 의젓한데 살 오르지 못한 파들은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철길 숲 끝에는 작은 주차 공간이 있고 금호강을 조망하는 2층 팔각 정자인 '철마루'가 자리한다. 물가에 나란히 앉은 의자들이 물새들 노니는 고요를 지켜본다. 강변 집의 파란 지붕 옥상에 빨래가 팔락거린다.
성내 철길 숲 맞은편으로 철거되지 않은 침목의 길이 약 250m 이어진다. 이 길은 2021년에 만든 '역사문화탐방로'의 '근현대사의 길'에 속해 있다. |
성내 철길 숲 맞은편으로 철거되지 않은 침목의 길이 약 250m 이어진다. 이 길은 2021년 에 만든 '역사문화탐방로'의 '근현대사의 길'에 속해 있다. 이 길은 북쪽으로 북천 건너 신녕천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하근찬 징검다리 건너 금노동 둑방길을 따라 이어진다. '근현대사의 길'은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여류 작가인 백신애와 동시대 식민지 대중문화운동의 길을 열었던 작사가 왕평 이응호, 그리고 하근찬을 기리는 길이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하다고 흥얼거리는 사이 병와 이형상이 월선을 띄운 구곡의 물줄기와 근현대사의 길이 겹친다. 1700년이면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렀던 숙종 때다. 그로부터 수난이대를 거쳐 30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흘렀다. 철길 아래 장난감처럼 앙증맞은 포크레인이 길을 내는지 물길을 트는지 한창 작업 중이다. 빨간 기차가 굉음을 내며 지나간다.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속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제 할 일을 하는 모든 것이 경이롭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 Tip
경부고속도로 영천IC로 나가 직진한다. 봉작교차로에서 좌회전, 도동네거리에서 우회전, 주남네거리에서 좌회전, 금노지하차도 지나 금노사거리에서 좌회전해 가다 삼거리가 나오면 좌회전한다. 영천버스터미널 지나 영서교를 건너 서문육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성내동 마을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골목 따라 직진하면 장수실버타운, 장수요양원이 보인다. 장수요쟝원 옆에 성내 철길 숲이 위치한다. 철길 숲 시작 지점인 새마을구판장(구터2길 3-10) 주변에 주차 가능하다. 철길 숲 끝의 팔각정자 앞에도 주차장이 있고 유정숲(성내동 247-132)에도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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