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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

2024-12-23

파당·분열의 한국 정치 현실
中 오자서 비극 역사와 닮아
급해도 길이 아니면 피해야
동지가 지나면 해는 길어져
긴 밤 후에 올 새날을 기다려

[아침을 열며]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
박순진 대구대 총장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주말 아침 단톡방에 팥죽 사진이 올라왔다. 뉴스를 보며 어수선한 세상을 걱정하던 중이었다. 늦은 오후에 옷을 챙겨 입고 팥죽 먹으러 가니 죽집은 손님으로 가득하다. 한쪽에는 할머니들께서 팥죽을 맛나게 들고 계셨다. 도회지 젊은이에게 동짓날은 그냥 겨울의 하루일 뿐이고 추위를 피해 옷을 동여매면 그만인 날이다. 도회지에 살면 절기에 무심해진다. 동지는 낮의 길이가 가장 짧은 날이다. 이맘때 오후에 산책이라도 할라치면 어느새 해가 저문다. 할 일이 있으면 바짝 서둘러야 한다.

팥죽 한 그릇 먹고 길을 걷다 보니 겨울 해가 어느새 서산으로 기운다. 저무는 해를 보며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는 일모도원(日暮途遠)의 고사가 떠올랐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이 말은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이 없다는 뜻이다. 고사의 주인공인 오자서는 본디 초나라 사람인데 아버지와 형제가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은 후 그 원수를 갚기 위해 나선다. 오나라로 망명하여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파란만장한 역사에서 오래 남을 활약을 하였으나 종국에는 오나라 왕으로부터 내쳐지고 비참한 죽음을 맞은 인물이다.

오자서는 억울하게 죽은 가족의 원한을 품고 오나라로 망명하여 결국 오나라의 힘으로 조국이던 초나라를 침략하여 점령하였다. 가족의 원수를 갚고자 이미 죽은 왕의 무덤을 파헤치는 등 천리를 거스르는 일을 저질렀다. 이를 나무라는 옛친구의 말에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였다고 변명하였다. 이후 오월동주, 와신상담으로 이어지는 역사가 참으로 드라마같이 전개된다. 돌이켜보면 모함하여 죽이고 원수를 갚아 복수하는 일련의 비장한 사건은 하나하나가 잔혹한 역사이고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일들을 보면 이들 역사와 닮은 부분이 있다. 안타깝게도 작금의 우리 사회는 편을 가르고 파당을 짓고 서로 비방하며 죽자고 싸우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다. 동시대를 살며 한 공간에 존재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공존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선진국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문명인답지 못하다. 할 일이 많다고 내 맘대로만 일을 밀고 가면 곤란하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길이 아닌 곳으로 갈 수는 없다. 함께 상생하는 정치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시 후진국 정치로 퇴행할 수는 없다.

크리스마스가 목전에 와 있지만 도회지 길거리의 성탄 분위기는 예전 같지 않다. 올해는 시국이 어수선하니 겨울이 더 춥고 길어질 듯하다. 도심을 나가봐도 흥겨운 분위기는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다.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추위는 당연한 일이겠으나 이번 겨울 추위는 유난히 더 매섭다. 날이 추울수록 관심과 온정이 필요한 사회적 약자는 힘이 든다. 세 밑이지만 나라 경제가 어려운 데다 난데없는 탄핵 정국에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다 보니 도움이 절실한 사회적 약자에게 이번 겨울은 어느 때보다 가혹한 시간이 될 듯하다.

실타래처럼 꼬인 정국이 당장 풀릴 것 같지는 않다. 극한 대립이 극적인 타협으로 이어질 리도 없다. 비상계엄 선포 이후 환율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고 힘든 경제 상황이 금방 살아날 것 같지도 않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계엄과 탄핵이라는 무시무시한 일을 겪으면서도 우리 일상이 곧바로 파국으로 떨어지지 않고 견뎌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걱정도 되고 긴장을 늦출 수는 없지만 그래도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주권자인 우리 국민의 저력이 놀랍다. 동지를 지나면 해는 다시 길어진다. 날이 저물고 밤이 지나면 새날이 온다.

박순진 대구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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