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 비판 사라진 국민의힘
해체와 괴멸 그림자 드리워
비전 잃고 일부 세력만 옹호
개방·실용주의 정책도 퇴색
반동적 극우 정당 전락 위기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
2024년 12월14일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면서 한국의 보수는 붕괴하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심판이 남아있다고 해도 인용 여부와는 관계없이 국민은 이미 윤석열 대통령을 탄핵하였다. 야당의 폭거를 저지하기 위해 결단했다는 비상계엄은 어떤 이유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위헌적이고 반민주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정치 문제를 대화와 타협의 민주적 방식으로 풀지 않고 군사적으로 해결하려는 윤석열 대통령의 시도는 우리 정치를 암울한 시대로 퇴보시키는 최악의 행위였다.
이념에 경도되어 급변하는 현실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운동권 기반의 진보 정당에 맞서기 위해 문재인 정부가 임명한 검찰총장을 영입하여 대통령으로 만들 때부터 보수는 이미 내부적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자신의 대통령 당선에 기여한 이준석 당 대표의 축출은 어떤 비판과 반대도 수용하지 못한다는 신호였다. 경쟁적인 야당을 오로지 제거해야 할 범죄자 집단으로 여기고 어떤 대화도 거부한 윤석열 대통령은 계엄이라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악수를 둠으로써 자신이 속한 보수 정당을 괴멸의 나락으로 몰아넣고 있다.
사람의 성격이 위기에서 드러나듯 어떤 조직과 정당의 힘은 비상사태에서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경험한 보수 정당 국민의힘은 탄핵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탓에 정치적 판단력이 경직되고 마비된 것처럼 보인다. 자신들이 배출한 대통령이 용납할 수 없는 위헌적 행위를 했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탄핵을 반대하면 계엄에 동조하는 것처럼 보이고 또 탄핵에 찬성하면 스스로 정권을 부정하여 야당에 이롭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 정치적 딜레마 상황에서 보수세력은 필연적으로 파열한다. 계엄 해제에 앞장서고 탄핵을 적극적으로 찬성한 한동훈 대표를 배신자로 낙인찍어 쫓아낸 국민의힘은 단일 대오를 형성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해체와 괴멸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국민의힘에는 국민의 뜻을 제대로 읽는 비판 세력이 여전히 없다. 탄핵에 반대한 의원이 대표 권한대행을 맡고 있고, 현재로서는 비대위원장도 탄핵에 반대했던 중진 중에서 나올 것처럼 보인다. 국민의 눈에는 국민의힘이 도로 친윤당이 되어 탄핵 심판을 앞둔 윤석열 대통령 뒤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에서는 무엇보다 실제로 어떻든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국민의힘은 '극우 정당'처럼 보인다. 한국 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75%가 탄핵을 찬성하는데 보수층에서 찬성 비율은 46%이고, 국민의힘 지지자는 22%만이 찬성한다고 한다. 국민의힘 정당 지지율이 20%대로 떨어졌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국민의힘은 이제 전체 보수층이 아니라 극우 세력을 대변하는 반동적 극우 정당이 되어 가고 있다.
보수 정당의 극우 정당화는 궁극적으로 보수의 죽음을 의미한다. 좌든 우든 정당의 극단화는 그 기본인 이념과 가치를 배신한다. 극우 정당은 엄밀한 의미에서 보수의 가치가 없는 세력과 정당이다. 극우 정당은 자신의 가치와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적대적인 반대 정당과의 대립을 통해 생존하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시대에 스스로 변하지 않는 정당은 자신의 기본 이념과 가치를 망각하고 결국은 배신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국민이 '지금 국민의힘은 도대체 어떤 가치를 대변하는 것이지?'라고 의심한다면, 보수 정당은 이미 생명력을 잃은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로 드러난 것은 그가 시대를 잘 읽지 못했다는 점이다. 시대의 변화는 탄핵을 촉구하는 시위에서도 잘 나타난다. 계엄이라는 비상사태에 직면해서도 국민은 크게 동요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응하고 있다. '무엇이' 비상사태인가를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민주 사회에서 더 중요한 것은 비상사태에 '어떻게' 대응하는가이다. 좌우에 상관없이 국민 전체에 정치적 문제를 폭력으로 해결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퍼져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이러한 민주 의식의 성숙은 진보와 보수의 이념과 가치도 변화시킨다. 보수의 가치는 다양하지만, 우리 국민에게 보수는 이제까지 대체로 세 가지로 이해된다. 첫째는 '권위주의'이다. 어떤 일을 가장, 단체의 우두머리, 대통령처럼 역사적으로 형성된 권위에 기대어 해결하려는 권위주의는 사실 집단주의의 뿌리가 깊은 우리 사회의 가장 강한 사고유형이다. 하지만 보수는 민주적 덕성보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권위주의의 끝판왕이라는 인식이 있다면, 이를 옹호하는 국민의힘은 어떤 이미지일까?
둘째, 보수는 '개방주의'를 추구한다. 언뜻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의 근대사에서 보수는 항상 '잘사는 미래'를 추구했다. 우리의 과거 역사가 어떤 것이었든 미래를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많은 사람이 마음과 힘을 한데 뭉치는 단합이라고 생각한 것이 보수였다. 이런 점에서 보수는 종종 미래를 위해 현재의 문제에 눈을 감는 경향이 있었다. 강력한 추진력을 위해 때로는 독재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위해 현재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지 모를 때, 현재의 고통은 견딜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미래의 비전을 상실한 보수는 현재의 기득권만을 옹호하는 집단으로 전락한다.
셋째는 '실용주의'이다. 이제까지 보수는 이념이 어떻든 행정은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시대의 흐름에 맞게 경제 정책을 잘 세우고,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안보 정책에서 탁월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우리가 선진국으로 발전하여 이만큼 잘살게 된 데는 보수의 공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좋은 정책을 실현하려면 언제나 사회와 국민의 뜻을 잘 읽어야 한다. 정책이 아무리 좋더라도 반대와 저항을 합리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실패하기 마련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잘한 게 무엇이 있느냐는 공격적 질문에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는다면, 보수는 실용적이라는 생각도 점차 퇴색할 것이다. 우리에게 지금 보수는 어떻게 비치는가? 개방적이지 않고 실용적이지도 않는 보수는 단지 권위주의적이기만 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인상은 보수의 극우화를 재촉할 뿐이다.
포스텍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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