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 기획 '내 이름은 투사'] 대구광복회 선정 이달의 독립운동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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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10월25일 임시의정원 34회 회의를 마친 독립지사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날 좌우통합을 이룬 통일의회가 출범했다. 뒷줄 가운데 콧수염을 기른 이가 이상정이다. 〈상화기념관·이장가문화관 제공〉 |
◆대구 1호 서양화가, 붓을 놓고 전쟁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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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최초 서양화가이자, 항일전선에 뛰어들어 '투사'가 된 이상정 장군. 〈상화기념관·이장가문화관 제공〉 |
맏형 이상정은 일찍이 예술과 학문에 뛰어났지만, 조국을 위해 전쟁터에 직접 뛰어들며 '무장 투쟁의 삶'을 택했다.
1909년 일본 유학을 떠나 세이죠중학교를 다녔고, 이후 동경미술학교와 상업학교에서 공부했다. 1919년 가쿠슈인대학에서 역사와 미술을 공부했다.
대학 졸업 후 귀국한 그는 '대구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만능 예술가로 활동했다. 잡지 '개벽' 창간 2주년 기념호에 시조(2수)도 발표한 현대시조 작가다. 서예가로도 활동했다. 대구 계성학교와 대구신명여학교에선 미술을 가르쳤다.
1921년엔 서양화 개인전을 열었다. 2년 뒤 미술연구소 '벽동사'를 창립했다. 당시 그가 13개 작품을 출품했던 대구미술전시회에 대해 동아일보는 "남국의 정조와 풍토를 가진 곳(대구)에서 처음 표현되는 예술의 빛이다. 무료입장이며 매일 500~600명씩 관람해 좁은 공제회관이 터져나갈 정도로 성황"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쪽에는 일제 통치에 신음하던 조국이 깊게 자리잡고 있었다. 고민 끝에 붓을 내려놓고 행동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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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정 장군이 중국 망명에 오르며 어머니와 찍은 가족 사진. 왼쪽부터 막내 이상오·맏이 상정·둘째 상화·셋째 상백. |
전쟁터에선 한 여걸을 만났다. 이름은 권기옥. 3·1 만세운동에 참여해 실형을 살고, 중국에 넘어가 육군항공학교를 졸업한 대한민국 최초의 여류 비행사다. 1926년 10월 간단한 혼례를 올린 뒤 동거했다. 부부였지만, 전우에 더 가까웠다.
이상정은 권 여사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도산 안창호가 주도한 '흥사단'에 가입했다. 윤봉길 의사에게 폭약 제조 전문가를 알선했다.
활동 반경은 더 넓어졌다. 1939년 독립사상 고취를 위해 청년호성사를 조직하고, 잡지 '청년호성' 창간도 주도했다. 1940년엔 광복군 창설에 기여했다. 1942년에는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 경상도의원(지금의 국회의원 격)으로 선출됐다. 그해 통합임시정부가 출범되자, 외무부 외교위원에 선임됐다.
이상정은 광복 전까지 중국 육군유격대 훈련학교 교관으로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광복 후엔 북지 방면 일본군의 무장 해제에 앞장섰다. 교민들의 권익 보호와 국내 귀환을 돕기 위해 중국 상해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광복된 조국땅을 밟은 건 광복 2년 뒤인 1947년 8월27일. 청춘을 독립운동에 바쳤지만, 광복을 누린 기간은 고작 2개월뿐이다. 그해 10월27일 그는 뇌출혈로 급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개벽'誌 시조 발표·서예가·교사 등 활동
일제 통치에 신음하는 조국 현실 통탄
'용진단' 결성 이어 中 망명 무장투쟁의 삶
첫 女 비행사 권기옥과 부부이자 동지
광복군 창설 기여·후진 양성에도 앞장
광복후에도 中 누비며 교민 귀환 온힘
광복 2년뒤 귀국 두 달만에 뇌출혈 급사
후손들 '이상정 아트스페이스' 계획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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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중구 계산동2가에 있는 이상정 고택. 현재 이곳은 민간음식점으로 운영되고 있다. 박영민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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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정의 직계 손자인 이재윤씨는 3세때부터 소아마비를 앓아 오른팔과 다리를 쓸 수 없었다. 지금은 파킨슨병 증세가 악화돼 요양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그를 간호하는 건 바로 이상정의 증손자 이동섭(41)씨다.
이동섭씨는 영남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항상 저에게 '우리는 대단한 집안이다. 증조 할아버지는 대단한 분이셨다'고 알려주셨다"고 했다.
그는 "처음엔 증조 할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잘 몰랐다. 교과서를 보다가 집에서 본 사진이 나오길래 깜짝 놀랐다. 이후 역사책을 보면서 증조 할아버지에 대해 공부했다. 지금은 그 누구보다 자부심을 갖고 산다"고 했다.
이씨는 이상정 장군이 동생 이상화 시인에 가려져 주목받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쉽다고 했다. 그는 "이상화 시인은 대구 버스정류장에 얼굴이 붙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상정 장군은 잘 주목받지 못한다. 이상화 시인 사진 옆에 같이 사진이 걸리면 좋겠다"고 했다.
이씨는 특히, 이상정 선생이 대구 1호 서양화가였다는 점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 그는 "이상정 장군이 대구에 서양화를 최초로 들인 인물이고, 나중엔 붓을 놓고 전쟁터에 뛰어들어 독립운동을 한 사실이 기억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달서구에 '이상정 전시관' 추진 중
지난 19일 오후 방문한 대구 달서구 대곡동 상화기념관·이장가문화관. 이곳에선 이상정 장군과 그의 일가족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이상정을 소개하는 코너는 전시관 2층에 있다. 그가 손수 쓴 편지, 가보로 남긴 단검 등 유품들이 전시돼 있다.
건물 3층은 향후 '서양화가 이상정'을 기억하는 공간으로 조성될 예정이다. 이상화 시인의 손자인 이재원 이상정기념사업회 부회장은 이상정의 업적을 보존할 책무가 있다고 느껴 '이상정 아트스페이스'를 전시관으로 만들 계획이다.
이 부회장은 "이상정 장군이 독립운동을 한 사실은 어느 정도 알려졌다. 하지만, 대구 최초 서양화가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많다. 현재 미국 등에 흩어진 그의 작품을 모으고 있다. 다만, 보존된 작품이 부족해 다른 연관 인물들의 작품도 가능하면 함께 전시할 생각"이라고 했다.
박영민기자 ympar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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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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