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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년전 헤어진 친부모 찾는 인정혜씨의 편지 “저는 잘 자랐어요 꼭 연락주세요”

2025-03-27
56년전 헤어진 친부모 찾는 인정혜씨의 편지 “저는 잘 자랐어요 꼭 연락주세요”

56년 전 헤어진 친부모를 찾는 인정혜씨. 인씨는 노르웨이로 입양된 후 덴마크 금융기관의 수석 부사장, 글로벌 책임자 등을 역임했다. <본인 제공>

56년전 헤어진 친부모 찾는 인정혜씨의 편지 “저는 잘 자랐어요 꼭 연락주세요”

56년 전 헤어진 친부모를 찾는 인정혜씨. 인씨는 노르웨이로 입양된 후 덴마크 금융기관의 수석 부사장, 글로벌 책임자 등을 역임했다. <본인 제공>

56년전 헤어진 친부모 찾는 인정혜씨의 편지 “저는 잘 자랐어요 꼭 연락주세요”

56년 전 헤어진 친부모를 찾는 인정혜씨. 인씨는 노르웨이로 입양된 후 덴마크 금융기관의 수석 부사장, 글로벌 책임자 등을 역임했다. <본인 제공>

56년전 헤어진 친부모 찾는 인정혜씨의 편지 “저는 잘 자랐어요 꼭 연락주세요”

1971년 당시 만 2세의 인정혜씨. <본인 제공>

56년전 헤어진 친부모 찾는 인정혜씨의 편지 “저는 잘 자랐어요 꼭 연락주세요”

1972년 만 3세의 인정혜씨. <본인 제공>

56년전 헤어진 친부모 찾는 인정혜씨의 편지 “저는 잘 자랐어요 꼭 연락주세요”

1976년 유년기 시절의 인정혜씨. <본인 제공>

56년전 헤어진 친부모 찾는 인정혜씨의 편지 “저는 잘 자랐어요 꼭 연락주세요”

1974년 유년기 시절의 인정혜씨. <본인 제공>

56년전 헤어진 친부모 찾는 인정혜씨의 편지 “저는 잘 자랐어요 꼭 연락주세요”

청년기의 인정혜(오른쪽)씨. <본인 제공>

TO. 나의 부모님!

늘 그리웠습니다.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문득문득 아팠습니다. 아픔은 되새김질 하듯 쉼 없이 이어졌습니다. 때론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불편했고, 때론 가슴에 응어리져 통증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렇다고 걱정하지는 마세요.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그 아픔은 비통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움과 원망에서 비롯된 것도 아닙니다. '나의 어머니'를 '나의 아버지'를 보고 싶은 마음, 그 간절함이 쌓이고 쌓여 통증처럼 느껴지는 것이니까요.

그러면서 질문은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나를 낳아준 부모는 어떤 분인지? 고아원에는 왜 맡겨졌는지? 입소 전에 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갖은 질문이 끝나지 않은 이야기처럼 계속됐습니다. 단순한 궁금증이 아닙니다. 섣부른 호기심도 아닙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아내는 건, 흩어진 퍼즐 조각을 맞추는 일이면서 나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입니다.

그래서입니다. 오래전부터 저를 낳아준 부모님, 당신들을 찾고 있습니다. 처음엔 기대가 컸습니다. 금방 만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길고 아득할지는 미처 몰랐습니다.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포기할 수 없습니다. 질기고 질긴 부모와 자식의 인연, 지금은 끊어졌지만 언젠가는 다시 이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대구 동구 성화원 '#6552 In Jung Hae'

1969년 6월27일, 당신들은 저를 대구 동구의 '성화원'이라는 고아원에 맡기셨습니다. 제가 어렵게 구한 입양 전 기록에는 1969년 1월14일생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름은 'In Jung Hae', 어떤 서류에는 한글로 '정혜'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저를 낳아준 부모가 지어준 이름인지, 고아원에서 받은 이름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혈액형은 A형(Rh+)입니다. 서류 곳곳에는 '#6552 In Jung Hae'라는 영문 이름과 함께 고유번호가 적혀 있습니다. '6552번', 갓 태어난 아이게 부여된 네 자리 숫자가 먹먹하게 전해져 옵니다.

사진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사진을 보면 참 귀여운 아기입니다. 까만 눈동자와 젖살이 오른 통통한 얼굴, 고슴도치처럼 쭈볏쭈볏 올라온 머리카락은 앙증맞고 사랑스럽습니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고아원에 맡길 때, 당신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어른이 된 지금 그 마음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립니다.

또 다른 기록에는 고아원 생활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저는 잘 놀고 잘 자고 잘 먹는 씩씩한 아이였나 봅니다. 목욕을 좋아하고 업어주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아이였다고 합니다. 기록에는 저녁에 재우려고 하면 잠투정을 하다가도 업어주면 곧장 잠이 들었다고 합니다. 대변도 하루에 꼭 한번 잘 보는 건강한 아기였습니다. 여느 아이들처럼 손가락을 빠는 버릇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교성도 무척 좋았나 봅니다. 기록에는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고 절대 혼자 있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습니다. 아무나 보고 잘 웃는 성격 좋은 아이였고, “엄마" “아빠" “인내"라는 말을 그 어린 나이에도 정확하게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인내'는 이름을 뜻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잘 울지 않는 성격이지만 배가 고프면 자다가도 깨서 울었다고 합니다. 이뻐하고 미워하는 것을 아는 똑부러지는 아이였고, 보모가 다른 아이를 안아주면 시기하고 울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어쩌면 당신들도 아기 때의 제 모습을 기억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저는 고아원에서도 씩씩하게 잘 지냈습니다. 혹시 아직도 제가 어떻게 지냈을지 걱정하고 계시다면 이제 그 마음 내려놓으세요.

◆노르웨이 입양 'Siri Lande'의 삶

성화원 입소 반년쯤 지난 그해 12월, 저는 노르웨이의 한 가정으로 입양됐습니다. 양부모님은 저에게 'Siri Lande'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때부터 'Siri Lande의 삶'이 시작됐습니다. 양부모님은 인품이 훌륭하고 다정다감한 분이었습니다. 저를 무척이나 사랑하셨습니다. 친척과 동네 주민들도 저를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부유한 가정은 아니었지만 사랑과 진실과 유대감은 어느 집보다 충만했습니다.

무엇보다 양부모님은 저의 입양 사실을 일찍 알려줬습니다. 무척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저 역시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한치의 고민도 하지 않았습니다. 문제 될 것도 없었습니다. 되레 금발의 친구들에게 “한국에서 왔다"며 떳떳하게 알렸습니다. 그러면서 차츰 제가 태어난 나라, 대한민국과 대구에 대해 알고 싶었습니다. 양부모님도 그런 저를 존중했고, 이후 한국을 방문하도록 격려하기도 했습니다.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은 양부모님 덕에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학업과 스포츠에 두각을 나타내며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학·석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경영학과 재무학을 공부한 후 덴마크의 금융기관에서 오랫동안 일했습니다. 나름 승승장구하며 수석 부사장, 글로벌 책임자까지 지냈습니다.

50세가 되기 전에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습니다. 천연 미네랄 워터 브랜드를 런칭하며 창업에 나섰습니다. 노르웨이의 미네랄 워터를 생산해 국제시장에 판매하는 기업입니다. 운 좋게도 첫 번째 진출 시장이 모국인 한국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묘한 인연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다른 기업의 컨설팅을 맡고 여러 회사의 이사직을 맡는 등 전문 CEO로도 활발히 일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보기에도 이만하면 반듯한 딸로 자랐다고 할 만 하죠. 혹시 자식을 버린 부모를 원망하며 삐뚤어지지 않았을까 걱정하셨다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들도 이제 충분히 자랑스러워 하셔도 됩니다.

◆ “보고 싶습니다. 나의 어머니 아버지"

당신들을 찾기 위해 한국에도 여러 번 방문했습니다. 1997년이 첫 방문이었습니다. 20대 후반이 된 저는 당시 홀트아동복지회가 여는 '해외입양 청소년 여름학교'에 참여했습니다. 처음 찾은 모국은 저를 설레게 했습니다. 내가 태어난 나라, 나를 낳아준 부모님과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떨렸습니다. 길 모퉁이를 돌아서면 어머니가 서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담벼락 너머 고개 돌리면 아버지가 제 이름을 부르며 웃음 짓고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 기대를 안고 틈만 나면 저의 흔적을 찾아다녔습니다. 흔적들을 퍼즐처럼 맞추다 보면 당신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요. 홀트에 방문해 입양 관련 서류들을 열람했지만, 기존에 알고 있던 정보 이상은 얻지 못했습니다. 막막하고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듬해인 1998년 저는 다시 한국을 찾았습니다. 노르웨이 한국입양인연맹 회장으로 있으면서 한국에서 열린 첫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그 모임에서 대표로 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한국 언론에도 보도된 것으로 아는데 별 소득은 없었습니다.

수년 동안 한국인도 많이 만났습니다. 그중엔 대구 출신 친구도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제가 친부모를 찾을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하지만 단서는 더이상 찾을 수 없었습니다. 2011년과 2015년에는 한국인 입양자 친구들과 서울에 방문해 홀트와 미팅을 가졌습니다. 역시 새로운 정보는 얻지 못했습니다. 이미 제가 맡겨졌던 대구 성화원이 1997년 문을 닫아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친부모를 찾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했습니다. 10여년 전엔 미국 DNA 검사기관인 'FTDNA(Family Tree DNA)'와 해외입양 가족을 찾아주는 단체인 '325KAMRA(캄라)'에 제 DNA를 등록했습니다. 당신들도 저를 찾기 위해 DNA를 등록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 때문이었죠.

하지만,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당신들의 나이를 고려하면 빨리 만나야 한다는 생각 뿐입니다. 원망도 미움도 증오도 없습니다.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습니다. 56년 전의 선택을 이해하고 존중합니다. 이 편지를 보신다면 주저하지 말고 꼭 연락주세요. 보고 싶습니다. 나의 어머니, 아버지!

P.S

영남일보는 최근 인정혜씨의 사연을 취재하기 위해 수차례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가 보내오는 답변서를 읽을 때마다 친부모를 그리는 애틋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마음을 생생하게 전하기 위해 편지형식의 기사를 싣는다. 편지는 서면 인터뷰와 그가 쓴 인정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재구성했음을 밝힌다. 현재 인씨의 DNA는 편지에서 밝혔듯이 '325KAMRA(캄라)'와 'FTDNA(Family Tree DNA)'에 등록되어 있다. 다음달 4일엔 대구를 방문해 경찰서에서도 DNA를 등록할 계획이다. 그녀를 찾는 친부모는 정부의 '유전자 등록 제도'를 이용하면 된다. 가까운 관할 경찰서에 방문해 신청할 수 있다. 또 이메일 'hyunhee@yeongnam.com'(조현희기자)로 제보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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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희

문화부 조현희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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