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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미 변호사 |
그러나 빙하기가 닥쳐오면서 둘리는 남극 대륙의 빙하 밑에 파묻히게 된다. 빙하가 떨어져 나와 빙산이 되자 빙산은 태평양을 지나 남해 서해를 돌아 대한민국 서울에 한강까지 흘러들어 왔다. 주변 시민과 냉면집처럼 얼음을 취급하는 사람들이 청정한 얼음을 가져가면서 빙산은 점점 작아지고 둘리는 쌍문동 개천으로 흘러 들어간 후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 빙산에서 깨어난 둘리는 일면식도 없는 고길동의 딸 고영희를 뒤쫓아 고길동의 집으로 간다.
이후 둘리는 고길동으로부터 밥이나 축낸다고 구박받고, 도우너와 또치 등 친구들을 데려왔다고 구박받고, 집안의 기물을 손상했다고 구박받는다. 둘리의 연령대는 알 수 없지만 빙하기 이전에 태어났으니 나이로 치면 고길동보다 훨씬 많음에도 불구하고 고길동으로부터 거지 같다며 무시당하고 고길동의 조카 희동이까지 돌보는 베이비시터 역할까지 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 고길동이야말로 둘리로 인한 최대의 피해자이자 희생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길동은 서울 도봉구 쌍문동에 사는 40대 만년 과장이었는데, 외벌이로 부인 박정자와 아들 고철수, 딸 고영희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처남이 해외 유학을 가면서 자녀인 박희동과 박영동을 맡기고 가는 바람에 고길동은 처조카들까지 먹여 살리게 되었다.
당시 주5일 근무제 실시 전이라서 회사원인 고길동은 주말만큼은 푹 쉬어야 했는데, 이웃에는 '라면과 구공탄'을 불러제끼는 백수 마이콜이 이사 와서 소음을 내고 둘리 일당이 시도 때도 없이 사고를 쳐서 조용한 날이 없었다.
둘리가 도우너와 또치를 집으로 불러들이기까지 해서 고길동네는 생계비가 증가했다. 둘리 일당의 장난이나 사고로 집 여러 채 살 만한 돈도 날려 금전적 손실이 어마했다. 고길동은 바둑, 낚시, 레코드판 수집 등 다양한 취미 생활을 즐겼지만, 그마저도 둘리 일당이 부수는 등 말아 먹었고 아마존 밀림, 저승, 우주 등 안 끌려가 본 곳이 없다. 둘리는 고길동에게 돈을 벌어다 준답시고 은행을 건물채로 뽑아서 집으로 가져오기도 했고 이로 인해 고길동은 은행강도 교사 혐의로 경찰에 연행되어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받아야 했다. 둘리는 계속 사고를 쳤지만 동물이라 사법당국의 구속 등 적절한 조치가 이루어지지 못했고, 이로 인해 고길동의 탈모가 심각해지고 살도 10㎏ 이상 빠졌다. 처자식과 조카들, 원치 않는 반려동물들까지 부양해야 했던 40대 만년과장 고길동의 삶의 무게가 어느 정도였는지 이제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자라나는 고영희와 고철수의 교육비며 노후를 생각하면 막막하고 두렵기도 하겠지. 고길동도 청년 시절이 있었고 꿈도 있었을 텐데 짠하다. 둘리보다 고길동이 더 불쌍하면 어른이 되는 거라고 한다.
이은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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