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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진 <법무법인 세영 변호사> |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는 모바일 콘텐츠 서비스 기업이었다. 스마트폰은커녕 칼라폰도 보급되지 않은 시기에 매우 앞서가던 기업이었다. 이 회사에서는 휴대폰으로 할 수 있는 인터넷 웹게임, 만화서비스, 배경화면 다운로드 서비스 등을 제공하거나 추진 중이었다. 한국의 콘텐츠를 일본 이동통신사에 수출하거나, 일본 콘텐츠를 들여와 한국 통신사를 통해 서비스하는 프로바이딩 사업도 하고 있었다.
나는 기획팀에 소속됐다. 콘텐츠 기획 업무는 상당히 재미있었고 팀 분위기도 매우 밝고 활기찼다. 팀장은 미국에서 MBA유학을 하고 한국에서 일하던 일본인 여성으로 유창한 한국어와 환한 웃음으로 팀원들을 대해줬다. 나는 그와 같이 일하는 것이 매우 편하고 즐거웠다.
그 무렵 나는 한 콘텐츠 업체와 체결할 계약서를 검토하고 있었다. 콘텐츠를 일본에 수출하려는 사업구조에 비춰보니 계약서는 곳곳에 문제가 있는 것이 보였다. 문제 조항들을 수정한 안을 만들었고 이를 팀장에게 보고했다. 팀장은 평소와 달리 웃음기가 조금 사라진 얼굴로 '먼저 퇴근하세요'라고 했다. 이상한 느낌이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회사에 출근한 나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마치 회오리 바람이 지나간 것 같았다. 재무팀장이 나를 불러 말했다. 팀장이 어젯밤 사장에게 "그 직원과는 같이 일할 수 없다" "본인과 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단다. 전날까지 함께 웃으며 일했던 팀장이 이런 말을 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 날 나는 기획팀에서 마케팅팀으로 부서 이동했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건 오랜시간이 지나 변호사가 되고 나서였다. 한국의 기업문화에서는 내가 한 행동은 모범적인 일이었다. 자발적으로 문제를 파악하고 능동적으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직원의 덕목이다.
그런데 일본의 조직문화는 달랐다. 일본기업에서는 부하직원은 상사의 복종에 따라야 하고 지시없이 먼저 일을 처리하는 것은 '선넘는 행위'로 여겨질 수 있었다. 부하직원은 상사에게 존중과 함께 겸양을 보여야 했다. 일본인 팀장은 자신이 지시하지도 않은 일을 내가 한 것에 상당히 불쾌감을 느낀 것이리라.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 팀장의 짧은 말 한마디 "먼저 퇴근하세요"에는 낯선 문화의 경계선이 있었고 말로 표현하지 못한 갈등이 있었다. 이제는 이 말이 품고 있던 무언의 신호를 조금은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이정진 <법무법인 세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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