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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박한 언어로 펼쳐놓은 제주도 흙·풀·바다

2025-06-12 15:35

제주도의 자연 풍광. 제주로 내려간 문태준 시인이 아홉 번째 시집 '풀의 탄생'을 펴냈다. <게티이미지뱅크>

"풀은 연하게 소생하고, 힘줄처럼 억세지고 가을에는 노래를 짓는다. 깡마른 얼굴로 눈보라가 지나가는 걸 본다. 나는 풀 아래에서 일어나고 풀 아래에 눕는다."(시인의 말)

시인의 시에는 '풀'이라는 시어가 자주 등장한다. 풀은 서정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시어이지만 이 풀은 그간의 것들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시인은 일 년 내내 푸릇푸릇한 풀과 억센 풀, 마른 풀 등 풀로 꽉 찬 세계를 본다. 태어난 곳은 경북 김천이지만 제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풀밭의 살림을 일궈 풀과 산다. 풀밭에서 우는 풀벌레를 보며 생명의 근원에 대해 생각한다. 김천에서는 무속적인 것, 논밭의 일을 하는 고된 노동, 대물림되는 가난과 무너지는 공동체 같은 것들이 시의 목소리가 됐다면 제주에서는 흙과 바다에서 피어오르는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이런 자연 세계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생명이 된 것 같다.

문태준 시인이 아홉 번째 시집 '풀의 탄생'을 펴냈다. 3년 만에 펴낸 신작이다.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 올해로 시력 30년을 채운 그는 '한국 서정시의 대가'로 불린다. 그 칭호에 맞는 시 세계를 오랜 시간 일궈왔다. 이번 시집은 그의 아름다운 시학의 절정을 보여준다. 새로운 삶의 터전에서 전개되는 시인의 새 국면을 엿볼 수 있는 시편들로 가득하다.

'잎사귀에 빗방울이 떨어지네/ 나의 여름이 떨어지네// 빗방울의 심장이 뛰네/ 바라춤을 추네/ 산록(山綠)이 비치네/ 빗방울 속엔/ 천둥이 굵은 저음으로 우네/ 몰랑한 너와 내가 있네// 잎사귀는 푸른 지면(紙面)/ 너에게 여름 편지를 쓰네'(잎사귀에 여름비가 올 때)

문태준의 시는 풀벌레로 분한 시인이 여름을 앞두고 보내는 편지 같기도 하다. 시인은 제주에서 보고 만나고 느낀 풍광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을 그리며 썼다. 흙과 필연적으로 벗삼아 살아가는 시인의 오늘과 이제는 '흙속'에 있는 지난날과 옛 사람들, 흙 위로 피어오른 생명들, 여름날의 풍경들을 향수 어린 목소리로 노래한다.

'풀을 뽑으러 와서/ 풀을 뽑지는 않고// 보고 듣는/ 풀의 춤/ 풀의 말// 이러하나 저러하나/ 넘치거나 모자라거나/ 수줍어하며/ 그러하다는/ 풀의 춤/ 풀의 말'(풀)

시인은 제주 생활을 하며 "매달리거나 억지를 부리지 않는 것, 작위가 없는 것에 관심이 생긴다"고 했다. 그런 말처럼 소박한 문장을 보여준다. 화려하고 난해한 시들이 넘쳐나는 요즘에 어린 아이도 읽을 수 있는 단어들로 자연을 그려낸다. 그런 자연 안에서 또 비움과 고요의 자세를 견지한다. 자연을 그저 대상으로만 삼는 서정시와 다른 그만의 시적 태도다. 해설에서 홍용희 문학평론가는 "그의 시세계를 감상하는 것은 그가 초대하는 겸허한 고요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라며 "그가 펼쳐 보이는 고요의 세계는 우리의 눈과 귀를 틔워주고, 자연의 비경 속에서 어느덧 우리의 본모습과 마주하게 한다"고 평했다.

문태준 시인은 197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어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다. 199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해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등의 시집을 펴냈다. 노작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목월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박인환상, 무산문화대상 등을 수상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