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닫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
    밴드
  • 네이버
    블로그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250616027085916

영남일보TV

[문화산책] 길 위에서

2025-06-17 06:00
감정원 독립영화감독

감정원 독립영화감독

일 년 전, 46일간 스페인 북서쪽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약 800㎞에 이르는 길에 올랐다. 출발에 앞서 가장 먼저 짐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평소에도 6㎏에 가까운 무게의 가방을 메고 다니는데, 그 안에는 노트북, 책, 일기장, 우산, 간식거리, 여권, 도장 등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해결이 가능한 다양한 종류의 물건이 들어있다. 먼 길을 떠나려는 배낭의 무게는 10㎏을 훌쩍 넘겨버렸다. 배낭을 노려보며 짐을 싸고 풀고를 반복하며 물건들을 내려놓지 못하는 마음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결국 무게를 줄이지 못한 채 커다랗고 묵직한 짐을 둘러매고는 집을 나섰다. 온몸과 마음이 그 무게를 지탱해야만 했다.


순례길 위에 오른 첫날, 피레네 산맥을 오르며 배낭의 무게에 쉴 새 없이 투덜거렸다. '좋은 길 되세요!'라는 뜻의 '부엔 까미노!'를 외치며 지나가는 길 위 친구들의 얼굴보다 그들의 어깨 너머로 시선이 갔다. 사람만큼이나 짐의 무게와 모양들이 다양했다. 걷는 내내 나의 것과 비교하며 물 먹은 솜처럼 몸과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이어 가방에 든 물건들을 자주, 많이 써야만 하는 압박에 시달렸는데, 노트북을 꺼내 시나리오도 써야 하고, 책도 많이 읽어야 하고, 영상도 사진도 많이 찍어야 했다. 무언가를 계속해서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종착지까지 열흘 정도 남았을 쯔음, 작고 큰 돌멩이들이 발목을 붙잡는 고단한 언덕을 오르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사람을 발견했다. 주황색 잠바를 입고, 커다란 배낭을 메고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는 아주 천천히 힘겹게 언덕을 올라가던 뒷모습. 바로 나였다. 심장이 멎는 듯 숨이 막혔다. 언덕에 우두커니 멈춰 서서 멀어져 가는 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쓰러움, 미안함, 대견함의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옴을 마주했다. 요동치던 마음이 가라앉자 그저 타박타박 걷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한국으로 돌아와 공항에 내렸을 때, 나의 배낭은 돌아오지 않았다. 황당하지만 왠지 모르게 가볍고 자유로워진 마음에 비로소 이 길의 끝에 서 있음을 알았다. 길 위에서 나는, 나의 삶의 무게를 어느 정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문화 인기기사

영남일보TV

부동산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