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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하상의 기업인 열전] 제2창업과 아버지 극복하기

2025-07-18 06:00
1987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취임식. 입사 최고참인 삼성중공업의 최관식 사장으로부터 삼성그룹의 사기(社旗)를 물려받았다. <삼성그룹 제공>

1987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취임식. 입사 최고참인 삼성중공업의 최관식 사장으로부터 삼성그룹의 사기(社旗)를 물려받았다. <삼성그룹 제공>

◆이건희의 회장 취임


1987년 12월1일, 호암아트홀에선 삼성그룹 신임 회장의 취임식이 있었다. 관객석을 1천300여 삼성의 임직원들이 가득 메웠고, 신임 회장인 이건희는 복도중앙을 걸어나가 단상에 올랐다. 이병철 회장이 타계한지 20일이 갓 지났을 때였다. 이건희는 사장단의 추대형식으로 삼성그룹의 승계를 인정받았다. 단상에 신현확 삼성물산 회장과 그룹 사장단 전원이 배석한 가운데, 이건희는 거기서 입사 최고참인 삼성중공업의 최관식 사장으로부터 삼성그룹의 사기(社旗)를 물려받으므로써 경영의 대권을 쥐었다.


부친을 여윈 지 며칠 되지 않아서 취임사를 읽는 그의 목소리는 매우 떨렸고, 때로 울먹이기까지 했다. 분위기는 매우 가라앉아 있었으며 숙연하기까지 했다. 46세. 젊은 총수의 취임이었다. 취임식이 끝나고 사장단과의 식사가 있은 후 이건희와 사장단은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동 108-1의 고(故) 이병철 회장 자택으로 가서 고인의 상청 앞에서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1년2개월간 시간이 날 때마다 국내 재계의 선배들은 물론 미국 제너럴일렉트릭의 잭 웰치 회장 등 전 세계의 대기업 회장들에게 인사를 다녔다.


바쁘게 1987년 12월 한 달이 지나고, 1988년이 되었다. 1988년은 그가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 삼성이란 대그룹을 직접 경영해 본 첫 해이다. 또 1988년은 삼성의 창립 50주년이 되던 해였다. 그 해 3월 이건희는 '제2의 창업'을 선언한다. 그는 제2의 창업으로 신규사업 추진과 사업구조를 재편하겠다고 발표했다.


신규사업 추진이란 우주항구, 월면기지, 화성기지 건설 등을 현실화하기 위한 우주항공 산업으로의 진출과 유전공학, 고분자 화학 등의 진출을 말한다. 사업구조 개편은 그때까지 분리되어 있던 전자와 반도체, 통신을 하나로 합병하는 것이다. 경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나름대로의 판단이었다. 바로 이 때의 구조 개편이 오늘날 삼성전자가 세계적인 가전, 정보통신 메이커로서 자리잡게 된 시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건희 체제 하의 삼성의 구조 개편은 생각만큼 쉬운 것은 아니었다. 구조 개편은 어렵다. 우선 벽이 두터웠다.


연설하는 이건희 삼성그룹 신임 회장. <삼성그룹 제공>

연설하는 이건희 삼성그룹 신임 회장. <삼성그룹 제공>

"회장으로 취임한 이듬해 제2 창업을 선언하고 변화와 개혁을 강조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50년 동안 굳어진 체질이 너무도 단단했다. 내가 제일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1992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나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삼성 전체가 사그라질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체중이 10㎏ 이상 줄었다."


당시 그의 고백 중 하나이다. 그가 여기서 얘기한 '굳어진 체질'은 무엇이고, 그는 무엇 때문에 당시 한국 제일의 기업 삼성이 '사그라질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던 것일까. 당시 삼성은 선대 이병철 회장이 거의 50년간에 걸쳐 경영해 오면서 나름대로 한국 최고의 기업이라는 성취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 취임한 이건희의 눈으로 볼 때 삼성은 국내에서 최고라는 안일함에 빠져 자만감에 도취해 있던 기업이었다.


이병철 회장의 시대에는 모든 지시가 회장으로부터 내려왔고, 그걸 각 계열사가 실천하는 전형적인 상의하달식의 경영이었다. 또 사장단에 대한 문책도 이병철 회장 자신이 직접 했다. 삼성의 비서실은 1980~1990년대 한국 최강의 정보 분석 조직이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일도 잘했지만, 그만큼 권한도 강했다.


그러나 이건희는 삼성의 비서실이 개혁 없이는 삼성의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그 비서실의 책임자는 소병해씨였다. 소병해씨는 이건희와 동갑으로, 이병철 회장 시대에 그를 12년간이나 보필해 온 최고의 가신. 이건희는 3년 탈상 시점인 1990년 12월, 소병해 비서실장을 삼성생명 부회장으로 전격 전출시켰다. 그리고 신임 비서실장에 사대부고 4년 선배이자 제일제당, 제일합섬, 삼성생명의 사장을 지낸 이수빈씨를 기용한다. 이른바 친정 체제의 구축을 시작한 것이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왼쪽)과 유년 시절의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삼성그룹 제공>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왼쪽)과 유년 시절의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삼성그룹 제공>

비서실의 재구축


삼성그룹의 비서실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조직이 아니었다. 이병철 회장의 지시에 의해 선진국 대기업의 비서실과 군대 조직 등 다양한 부문을 벤치마킹하고 거기에서 이병철 회장의 개인적인 경영관이 보태져서 만들어진 특수 조직이었다.


비서, 즉 secretary라는 어휘가 처음 등장한 것은 15세기 영국의 황실에서였다. 당시 secretary들은 거기서 왕의 서신과 문서를 담당했다. 그러다가 1800년대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개인 기업들이 많이 생기면서 비서는 보편적인 직업이 된다. 이것이 영국과 미국의 비서 제도의 시작이다.


그러나 이병철이 도입한 비서 제도는 영국과 미국의 것이 아니었다. 그가 원용한 비서 제도는 독일의 대원수였던 몰트케(1800~1891)의 참모 조직이었다. 즉 secretary가 아닌 스태프(staff)였다. 전략의 천재였던 몰트케는 덴마크와의 전쟁(1864)이나 프로이센-오스트리아와의 전쟁(1866),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 등에서 이기기 위해 소위 참모 제도라는 것을 만들었다. 군대를 효율적으로 지휘하기 위해 스태프, 즉 참모 제도를 만들어 부대의 관리, 운영, 작전, 용병, 복지 등으로 분야를 나누고 특정 분야에 대한 책임과 권한을 동시에 주었다. 그들은 몰트케에게 필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서 상황을 판단하게 하고, 그에 따른 계획을 수립한 후 그 내용을 해당 부대에 명령할 수 있도록 보좌했다.


이 제도는 곧 일본으로 건너온다. 일본 정부가 근대식 군대 제도를 독일로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독일식 군대 제도를 배워 온 장본인은 가쓰라 고고로(桂太郞, 1848~1913)이다. 가쓰라 고고로는 훗날 일본의 수상을 역임했는데, 젊은 날 그는 3년간 독일에 파견되어 독일의 군정과 병제를 연구했다. 그 후 귀국해 육군성에서 대위로 잠시 근무하다가 다시 독일 주재 무관으로 파견 나가 오랫동안 정보 수집 분야에서 일했다. 그 후 청국 주재 무관을 거쳐 육군 참모본부 관서국장으로 영전되었고, 소위 광개토대왕비 비문 조작은 이 무렵 그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하는 그 장본인이다. 이후 3사단장, 육군차관, 대만총독, 육군대신(장관), 수상을 역임한 일본의 엘리트 중 엘리트였다. 그가 1878년 독일의 무관으로 있다가 귀국해 한 일 중 하나가 일본 육군을 독일식으로 개편하는 일이었다. 이때부터 일본에 소위 독일식 참모 조직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 후 일본의 참모 조직은 여러 곳에서 맹활약을 했다.


1943년 4월28일 일본 아사히신문이 촬영한 쇼와 천황과의 대본영 회의 모습. <위키백과 제공>

1943년 4월28일 일본 아사히신문이 촬영한 쇼와 천황과의 대본영 회의 모습. <위키백과 제공>

청일전쟁은 비서실의 승리


그 첫 번째가 청일전쟁이다. 청일전쟁 개전 직전, 가쓰라 고고로는 청국의 무관 시절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압승할 것을 예상했다. 그가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당시 청국의 북양해군이 보유하고 있는 함대는 허우대만 멀쩡했지 거의 고철덩어리 수준이었던 것이다.


즉 청국의 주력함인 독일 구루페사 제작의 정원(定遠), 진원(鎭遠)함은 각 7천335t으로 아시아 최대의 거함이었지만 속도가 느려, 일본의 함대가 비록 2천t급이었지만 함대 운용만 잘하면 청국의 함대를 이길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실제로 청일전쟁 개전 첫 전투인 1894년 6월23일 충남 아산 앞바다에서 벌어진 양국 전함의 한판 승부에서 청국 함대는 초전에 박살났다. 청국은 7천t 급의 정원, 진원을 주력함으로 중급함 광갑, 광을, 광병 등 전함을 투입했고, 일본은 낭속(3천709t), 고천수(3천709t)를 주력함으로 부상, 송도, 엄도함 등 2천t 급의 작은 전투함으로 맞섰다.


청국 함대는 척수, 톤수 및 중급함의 크기, 포의 크기 면에서 모두 일본보다 우위에 있었으나 일본의 속도전에 의해 궤멸됐다. 청국의 주력함인 정원, 진원이 14.5노트인데 비해 일본 함은 18노트여서 속력이 빨랐고, 일본 함대 지휘부는 이런 점을 최대한 이용해 청국 함대에 기민하게 다가선 후 속사포로 갑판 위의 포병들을 살상하는 작전으로 청국 함대를 무력화시켰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치밀한 정보력과 스피드를 무기로 한 함대 운용 때문이었다.


일본 정부는 이처럼 청일전쟁 개전 2년 전부터 각기 요로를 통해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작전을 짰고, 그 작전을 총지휘한 곳이 대본영(大本營)이었다. 즉 대본영은 수집된 모든 정보를 토대로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작전을 수립했다. 즉 천황의 비서실 역할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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