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미 변호사
다른 사람에게 욕설을 해서 모욕죄로 재판받는 피고인이 있었다. 그와 상담을 하기 위해 몇 번이나 전화를 해도 그는 "나는 죄가 없다"는 말만 두서없이 늘어놓았고, 사무실 방문 날짜를 잡자는 말만 나오면 스케줄을 보겠다고만 했다. 바쁘시면 전화로 사건 상담을 해도 된다고 했지만 반드시 방문상담을 원한다고 하면서 방문 날짜는 잡지 않았다.
이런 일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자 나는 그에게 재판 날짜가 다가오고 있는데 이제는 만나서 상담하고 재판부에 변론요지서도 내고 재판준비를 해야 되지 않겠냐고 진지하게 말했다.
사실 재판을 피하고 싶었던 그는 재판 날에도 나오지 않을 요량이었다. 내가 선임되기 전에도 법원 문서의 송달을 피하고 출석을 하지 않아서 법원이 경찰에 피고인의 소재탐지까지 촉탁했었던 사건이었다. 피고인은 내가 재판준비를 하려고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언성을 높이며 욕설을 했다.
며칠이 지난 후에 번아웃이 오는 느낌이 들었다. 변호사 생활 20년 하면서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나보았지만 이상하게도 이번 일로는 축 처지는 느낌이었다. 무기력했다. 그것은 그가 전화를 끊으면서 마지막으로 했던 말 때문이었다.
"국선 주제에."
'아, 내가 국선전담변호사로서 국선 사건만 하고 있는 것이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는 마치 인생이 잘못 풀리거나 변호사로서 실패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에 이르러 현실타격감이 왔다. 나는 내 일상을 구하기 위해 신뢰관계가 있는 정신과 원장님을 찾아 자초지종을 말했다. 욕설을 들었고, 위협도 느꼈다고. 그래서 다시 그가 찾아오거나 마주칠까 봐 두려운 마음,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서 원장님을 찾아왔노라고 말했다.
그러자 원장님은 당신도 위협을 느낄 때가 있다며 토로하셨다. 그래서 가스분사기와 가스총을 가지고 있다며 서랍을 여셨다. 나는 원장님이 가스총이 있다고 말씀하신 다음 서랍을 열기까지의 시간을 몸으로 느끼며, '역시 가스총 소지는 의미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섬주섬 서랍을 여는 사이 공격이 들어오면 무엇으로 막을 텐가. 사실 대한변호사협회에서는 가스총, 전기충격기 등의 호신용품 공동구매를 추진한 적이 있었다.
나는 호신용품 공동구매 이메일을 받고 내가 직접적인 위험 상황에 처한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가스분사기 어디 있지' 하고 몸을 움직이는 순간! 일격. 전기충격기를 지지지직 대려고 팔을 내미는 순간! 그가 나의 팔을 꺾고 나의 방향으로 돌리려 내가 지지지지직 오징어. '삼단봉이 있었지' 하고 얍 하고 들이미는 순간! 힘으로 빼앗겨서 도로 내가 맞는 그런 상상. 그래서 호신용품 공구에 참여하지 않았다.
원장님은 립스틱처럼 생긴 가스분사기를 보여주시고, 가스총도 보여주셨다. 가스총은 마치 권총처럼 생겼다. 원장님은 이어서 책상 옆 작은 문을 가리키며 저곳은 탈출할 문이라고 하셨다. 내 방에는 그런 곳이 없다.
원장님 책상 아래에는 경찰을 부르는 버튼이 달려 있어서 그걸 누르면 경찰이 3분에서 5분 사이에 온다고 했다. 3분이면 일격을 당해 쓰러지고도 남을 시간이다. 나는 원장님께 "총을 빼앗기면요?"라고 말했다.
원장님도 그럼 별 수 없다는 듯 시무룩 손으로 탈출문을 가리키셨다. "그럼 도망가야지 뭐."
원장님의 가스총을 본 것이 아무런 소득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 나만 사바세계에 있는 것은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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