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투쟁 ‘광복회’ 지휘장 맡아 日帝 세금수송 마차 경주서 습격

권영만 <국가보훈부 제공>
할아버지·아버지 이어 3대 항일운동
박상진·우재룡과 함께 광복회 결성
일제 탄압에 조직 와해 만주로 탈출
1920년 총독부 정부총감 암살 추진
계획 사전에 탄로 나 징역 8년 옥고
권영만(權寧萬, 1878∼1964) : 청송→경주→만주→충남 논산→함흥감옥→서울
1915년 8월20일 아침, 대구경찰서 정문 인근 상덕태상회의 문이 열리고 사내들이 한 사람씩 나와 사방으로 사라진다. 조금 전 상회 주인 박상진이 "25일 달성토성에서 출범할 광복회 창립 준비가 완벽하게 끝났습니다. 의혈 투쟁을 기조로 하는 만큼 우리의 목숨은 누구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게 됐지요. 부모님과 스승님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예를 올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제안한 데 호응한 행동들이다.
그는 또 "거사일이 목전인데 적의 심장인 경찰서 앞에 모여 있다가는 간교한 촉수에 포착될 염려가 큽니다. 해산했다가 25일 아침에 회동하십니다"라고도 했다.
전라도 지부장을 맡게 될 이병호는 보성으로, 경상도 지부장을 맡게 될 채기중은 상주로, 지휘장(참모장)을 맡게 될 권영만은 청송으로 출발했다. 권영만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이미 타계하셨지만, 그래도 산소 앞에 꿇어 엎드린 채 부모님이 주신 생명을 멋대로 버리는 불효는 용서를 빌어야 했다.
권영만은 대구경찰서 앞을 떠나 120리쯤 되는 보현산 기슭까지 와서, 7년 전(1908년) 우재룡 등 산남의진 장수들이 재기를 도모했던 거동사 아래를 지난다.
"경술국치 이래 무단정치에 대한 공포심과 망국의 좌절감에 짓눌려 국내 독립운동은 거의 전무했지…. 이제 191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독립운동단체로 평가받을 광복회가 창립된다! 우리 민족이 다시 일어나는 것이야!"

비밀결사 항일무장단체인 광복회는 1915년 8월25일 달성토성에서 결성됐다. 권영만은 광복회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금했다. 사진은 달성토성을 품은 달성공원의 모습.
권영만의 머릿속은 온통 항일 궁리로 가득 차 있다. "피는 속일 수 없어… 자나깨나 왜놈들과 싸울 궁리에 골몰해 있는 걸 보면…." 의병장이었던 할아버지 권수명의 대를 이어 아버지 권인환도 청송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권영만 또한 1907년 열아홉 때부터 정미의병 군사로 항일전에 참전했다.
거동사 옆을 내려온 후 자양 호수 왼쪽 산비탈을 줄곧 걸어 30리쯤 북상하면 죽장과 청송으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권영만은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진보향교 명륜당 전경. 권영만은 대여섯살 때부터 부친을 따라 청송 진보향교에 다녔다. 어린 권영만에게 진보향교는 놀이와 공부를 하는 공간이었으며, 부친의 정이 담긴 곳이다.
다음날, 진종일 걸어 청송 진보 광덕마을에 당도했다. 권영만은 대여섯 살부터 아버지를 따라 이곳 진보향교에 다녔다. 반변천 너머 비봉산에 세워졌던 진보향교가 현 위치로 이건된 때는 권영만이 여덟 살이던 1886년이다. 진보향교는 권영만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쌓인 놀이와 공부의 공간이자, 아버지 손을 잡고 애틋한 부정을 느꼈던 삶의 땅과 집이다.
"아버지는 어쩌다 집에 오시는 날이면 나를 향교로 데리고 가셨지…. 그러나 과거를 보게 하려는 뜻은 없으셨던 듯해. 수양을 도모하는 수기지학(修己之學)만 강조할 뿐 아들의 입신에는 통 무관심하셨으니…. 갑오년(1894)에 과거제가 폐지된 결과로 보면 선견지명이 계셨던 것인가?"

청송 진보향교의 내부. 반변천 너머 비봉산에 세워졌던 진보향교가 현 위치로 이건된 때는 권영만이 여덟 살이던 1886년이다.
권영만은 명륜당 뒤 동재와 서재를 둘러본다. 앞에 교육공간이 있고 뒤에 제향공간이 있어 전학후묘(前學後廟)인 점은 여느 향교나 서원과 마찬가지이지만, 학생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를 그 중간에 배치한 설계는 진보향교만의 특이한 점이다. 동재나 서재에서 자고 싶어도 집이 향교 인근이라 그럴 수 없었던 권영만은 어릴 때 아버지에게 "어째서 동재와 서재를 강당과 사당 사이에 지었습니까?" 하고 물은 적도 있다.
아버지는 "나는 어릴 때 네 할아버지께 그 질문을 여쭌 적이 없다. 네가 나보다 낫구나!" 하며 껄껄 웃으셨다. 권영만은 "동문서답을 하시네?"싶었지만, 아버지의 표정이 아주 흐뭇해 보여 덩달아 웃느라고, 또 아이답게 이내 잊고 곧장 다른 놀이에 몰두했었다.
공자의 위패 앞에서 권영만은 아버지를 떠올리며 묵념한다.
"광복회를 결성하면 더욱 가열차게 일제에 맞서겠습니다. 제가 어느 날 목숨을 잃는다 하더라도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혼의 성심을 다한 결과인즉 불효라 나무라지는 마십시오."

청송 남덕정은 독립운동가 허겸과 허위의 형이자 의병장 방산 허훈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곳이다. 허훈은 진보의 광덕리에 남덕정을 짓고 동생과 집안의 장래를 걱정했다고 한다.
다시 다음날, 권영만이 30리 거리의 남덕정(覽德亭)을 향해 동쪽으로 걷는다. 집을 나와 반변천을 건너면 길은 이내 오른쪽에 서시천을 두고 평평하게 이어진다.
남덕정에는 오늘도 간운헌(看雲軒) 세 글자가 뚜렷하게 걸려 있다. 흘러가는 구름을 보는 작은 집. 소탈한 전원생활을 뜻하는 듯싶지만, 일본군과 싸우느라 얼굴 볼 겨를이 없는 두 아우 허겸과 허위를 그리워하며 의병장 허훈이 마지막 삶의 시간을 보냈던 곳이다.

방산허선생묘도비. 방산(舫山)은 구한말의 학자이자 의병장인 허훈의 호다.
1896년 허훈은 고종의 지시에 따라 진보의진을 해산했다. 허위도 김산의진을 흩었다. 그 후 1907년 두 동생이 다시 의병을 일으키자 허훈은 농토 3천 마지기를 팔아 항일 투쟁 자금으로 건넸다. 그해 허훈은 향년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인 1908년 허위가 서대문형무소 제1호 사형수로 순국했다. 죽임을 당한 시신은 서대문형무소 뒷산에 아무렇게나 버려졌다. 진보 일대에서 3대 줄곧 왜적과 싸운 권영만 의병 가문이 허훈 형제의 명성과 정신을 삼가 모셔온 것과, 허위를 스승으로 모시기 위해 경주에서 유학 온 박상진이 권영만과 친밀하게 교유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었다.
스승 허위의 시신을 구미 금오산으로 모셔와 간소하게 장례 치른 박상진이 남덕정에 왔었다. 박상진은 7세 연상의 '동네 형' 권영만에게 놀라운 '보고'를 했다. "우재룡, 채기중 두 지사와 함께 사상 초유의 대규모 무장 항일단체를 결성하기로 의기투합했습니다. 형도 힘을 보태주시오" 권영만이 농사 지을 경비를 박상진에게 꾼 적도 있을 만큼 두 사람은 절친한 사이였다.

남덕정 광제문(光霽門) 현판이 걸린 재실.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광복회에 가입하게 된 인연을 돌이켜보며 권영만은 남덕정 뜰을 하염없이 거닌다. 그는 25일 결성식 때 발표될 광복회의 비밀·폭동·암살·명령 4대 행동 강령과 7대 투쟁 강령을 되뇌어본다.
"부호의 의연금 및 일제가 불법 징수한 세금을 압수해 무장을 준비한다. 만주에 군관학교를 설치해 독립전사를 양성한다. 본부를 상덕태상회에 두고… 무력이 완비되는 대로 일본인 섬멸전을 단행해 최후 목적을 달성한다."
8월25일 결성식을 마친 광복회는 그해 12월24일 첫 사업을 펼쳤다. 우리나라 사람들로부터 착취한 세금을 수송하는 마차를 권영만과 우재룡이 효현교에서 습격했다. 12월26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경주 아화 간(사이)에서 관금(정부 공금) 봉적(도둑 맞아), 8천700원(현 시세 2억5천만원 정도) 분실, 범인은 조선인"이라고 보도했다.
세금 수송마차 의거 외에도 광복회는 헌병소 공격과 일본인 경영 중석광산 습격도 실행했다. 독립운동 자금과 우국 청년들을 모아 중국으로 보냈다. 당대 악질 친일파들을 처단하기도 했다.
광복회는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의 공백을 메우고 민족 역량이 3·1운동으로 계승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했다. 일제는 '조선의 인심을 뒤흔드는(매일신보 1918년 10월16일)' 광복회 실체 파악에 모든 수사력을 쏟았고, 결국 박상진, 채기중, 이병호, 강순필, 임세규 등이 순국하면서 광복회는 와해됐다.
권영만과 우재룡은 일제의 포위망을 뚫고 만주로 탈출했다. 두 사람은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충남 논산으로 잠입했다. 광복회 재건에 목표를 둔 귀국이었다. 이 과정에서 권영만은 논산 부호 김재엽과 김유현에게 거액의 군자금을 받아 임시정부 요원 김규일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1년여 활발히 활동을 펼치던 권영만은 1920년 6월27일 일제에 검거되고 말았다. 광복회 만주 지부장 김좌진과 연락하면서 총독부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 암살 계획을 추진했는데, 전모가 일제 경찰에 포착되면서 붙잡혀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권영만은 광복을 맞은 1945년 9월19일 회장 이종태·부회장 우재룡·총무부장 권영만 명의의 '재건 광복회' 사무소를 서울 견지동 111번지에 열었다. 하지만 "미군정이 총독부의 행정기관과 관리들을 그대로 인수받았으니 친일파의 준동은 예정된 결과였다(강만길, 한국현대사)" 미군정은 1946년 1월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를 제외한 모든 군사 성격 단체에 해산령을 내렸다. 재건 광복회도 그해 3월 해산당했다.
현실정치는 독립운동과 결이 다르다는 인식이 왕년의 독립지사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권영만도 1947년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는 한독당 결성에 참여했다. 그러나 1949년 6월26일 김구가 암살당했다.
권영만은 정치를 떠나 종교에 심취했다. 그가 굳게 신봉한 종교는 단군을 섬기는 민족종교 대종교(大倧敎)였다. 독립운동가 권영만이 뜻을 펼칠 공간은 일제 치하에서도 자유당 정권에서도 없었다.
글=정만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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