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칸 한옥의 고즈넉한 경치에 시간 가는 줄 모르겠네

청송 덕천마을은 청송심씨의세거지다. 고려말 심원부가 조선왕조를 거부하며 세 아들을고향에 내려보냈고, 그 후손들이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영남 만석꾼 심씨가문의 가옥 송소고택
일제때 지어진 50칸 규모 후송당고택
독특한 평면 民家연구에 유용한 성친댁
평산신씨 판사공파 집성촌의 종택 등
국가민속문화유산 지정 고택 6채 보유
전통의 멋 즐기는 한옥스테이도 운영
100년 전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 대부분은 한옥에 살았다. 지금은 대부분 아파트, 빌라 등 공동주택에 산다.
통계청의 2024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 주택 중 공동주택이 80%, 단독주택은 20% 정도다. 2021년 '한옥 통계 백서'는 전국의 한옥이 8만5천 채, 전체 건물 수의 1.1%라고 한다. 다가구주택을 제외한 일반 단독주택에 사는 사람은 열 명에 한 명 정도이고, 한옥에 사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0.4%도 안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옥에 사는 사람은 매우 적지만, 한옥에 대한 관심과 호감은 근래 크게 높아졌다. 2021년 국가한옥센터의 설문조사 결과는 응답자의 84%가 한옥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거주할 의향이 있는 적극적인 사람들도 23%가량으로 집계됐다. 사람들이 높은 건축비, 일상생활 불편, 추위 등 일반적으로 알려진 한옥의 단점보다 친환경, 건강, 아름다움 등 장점을 더 크게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옥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먼저 기와지붕, 마루, 온돌, 아궁이 등 한옥의 건축적 요소들을 떠올리거나, 하룻밤 묵은 고택의 아침 햇살을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어릴 적 한옥에서 자란 사람들은 처마 끝 고드름, 푹 꺼진 정지(부엌) 바닥, 문종이 바르는 날의 분위기가 생각나기도 할 것이고, 밤중에 변소 갈 때 무섭다고 같이 가 주던 언니가 생각나기도 할 것이다. 사람들이 대체로 한옥이라고 인정하는 집은 욕실, 화장실, 부엌 등 공간은 현대화했더라도, 나무 기둥, 대들보에 기와를 얹은 집을 가리키는 듯하다.
한옥도 시대에 따라 늘 변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지금 남아있는 18~19세기 고택들의 구조는 엄격한 남녀유별, 장자상속 등 성리학적 세계관을 구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상속재산을 분가한 딸에게도 공평하게 분배했고, 제사도 돌아가며 지냈던 그 이전 시대에의 한옥 구조는 조금 달랐을 것이다.
요즘의 생활한옥과 18~19세기 고택의 차이는 훨씬 크겠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느끼는 아름다움이나 정서는 공통적인 부분이 있다. 외형뿐 아니라 안정감, 그리움, 전통과 연결돼 있는 느낌도 우리가 한옥이라고 부르는 집의 중요한 요소다. 고택을 둘러보고 하룻밤 묵어가는 것은 까맣게 잊고 지내왔던 소중한 기억을 되찾는 것처럼 의미 있는 일일 수도 있다.

청송 파천면 중들마을 평산 신씨 판사공파 집성촌에 자리 잡은 판사공파종택. 평산 신씨 27세손 신한태가 1705년경에 지은 것 알려져있다.
청송에는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택이 6채 있다. 현동면 신창마을의 후송당 고택, 청송읍 청운리의 성천댁, 파천면 덕천마을의 송소고택, 파천면 중들마을의 평산 신씨 판사공파 종택과 서벽고택, 사남고택이다. 또 덕천마을의 송정고택과 초전댁은 경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창실고택과 찰방공종택은 청송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후송당 고택은 사랑채는 1935년에, 안채는 1947년에 지어졌다. 50칸이 넘는 큰 규모의 가옥으로 시대 변화에 따른 한옥의 변천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사진은 청송 후송당 전경.

청송 후송당 후송헌.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후송당은 안채영역과 사랑채영역을 나란히 배치했다.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힘을 잃어가는 시대상을 보여준다.
후송당 고택은 사랑채가 1935년에, 안채가 1947년에 지어 그리 오래 되지는 않은 집이다. 그러나 50칸이 넘는 큰 규모의 가옥으로 시대 변화에 따른 한옥의 변천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조선 사대부 가옥은 원칙적으로 남성들의 사랑채 공간과 여성들의 안채 공간을 뚜렷이 구분했으나,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후송당은 안채 영역과 사랑채 영역을 나란히 배치했다.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힘을 잃어가는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택 들머리에는 함안조씨 세거지 비석과 이 집을 지은 후송 조용정 행적비가 있다. 비문에 따르면 후송은 의술로 가난한 병자들을 보살펴왔으며, 정미의병 당시 산남의진에 참여해 활동했다.
또 광복을 맞은 1945년에는 후세 교육을 위해 현동고등공민학교(지금의 현동중학교)를 설립했다. 그의 부친 일송 조규명은 을미의병 당시 안동의진에서 항일운동에 투신한 독립유공자다. 후송당 사랑채 옆 안마당으로 통하는 문 옆에 걸린 '가효국충(家孝國忠)'이라 새긴 팻말은 가풍을 짐작케 한다.

18세기경에 지어진 집으로 추정되는 민가인 청송 성천댁. 경북 지역에 흔한, 가운데에 안뜰이 있는 '뜰집' 형태다.
성천댁은 18세기경에 지어진 집으로 추정되는 민가이다. 초가지붕 대문채와 앞마당을 지나면 정면 5칸, 측면 4칸의 口자형 기와집에 사랑방, 안방, 부엌, 외양간까지 갖춘 본채가 있다. 경북 지역에 흔한, 가운데에 안뜰이 있는 '뜰집'이다. 특히 성천댁은 아담한 규모와 짜임새 있는 독특한 평면구성으로 한옥 애호가들의 관심이 높고 민가연구의 좋은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파천면 중들마을은 평산 신씨 판사공파 집성촌이다. 종택은 평산 신씨 27세손 신한태(1663~1719)가 1705년경에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문채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바깥마당 우측에 별채가 있고 그 뒤편에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된 口자형 본채가 있다. 본채 북동쪽 높은 곳에는 사당이 있고, 좌측 담장 너머에는 영정각과 서당이 좌우로 서 있다. 서당 앞쪽 낮은 곳에는 외거노비들이 살던 초가가 있다. 종택이 갖추어야할 건축적 격식을 고루 갖추고 있다. 별채와 사랑채 문 위에는 '청이무격랭(淸而無激冷)', '직이무첨족(直而無尖鏃)'이라는 붓글씨가 붙어있다. 판사공파 중시조인 고려 말 학자 신현의 행적을 기록한 '화해사전(華海師全)'에 나오는, 신현의 성품을 표현한 구절이라고 한다. 맑으나 차갑지 않고 곧으나 뾰족하지 않다는 뜻이다.

청송 서벽고택. 평면은 정면5칸, 측면 4칸 口자형 평면에 전면부분만 양쪽으로 한 칸씩 덧붙인 날개집 모양을 하고 있다.

집성촌을 이룬 사대부 계층의 종택과 분가고택의 주거문화 특징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사남고택의 전소되기 전의 모습. 지난 봄 대형 산불로 전소됐다.
영정각과 담을 사이에 두고 서벽고택이 있다. 신한태의 동생 신한창(1669~1749)이 분가하면서 1739년 건립했으며, 31세손인 신치구(1777~1851)가 증축했다. 평면은 정면5칸, 측면 4칸 口자형 평면에 전면부분만 양쪽으로 한 칸씩 덧붙인 날개집으로 건립 당시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서벽고택에서 한 집 건너에는 사남고택이 있었다. 31세손인 신치학(申致鶴)이 분가하면서 건립한 집으로 18세기 후반 건립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벽고택과 마찬가지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口자형 뜰집인데, 정면 동쪽에 큰사랑이, 서쪽에 작은사랑을 두어 앞면을 모두 사랑공간으로 구성했다. 큰사랑은 기단을 높여 누처럼 보이게 하고, 지붕은 팔작지붕을 올려 독립된 건물 같은 느낌이 들도록 한 점이 특징이다.
집성촌을 이룬 사대부 계층의 종택과 분가고택의 주거문화 특징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 2014년 세 고택이 함께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지난 봄 산불로 사남고택은 전소돼 지금은 수습된 부재들이 검은 차광막에 덮인 채 텅빈 마당에 남아 있다. 현재 복구 설계 중이며 내년에 공사가 시작될 예정이다. 산불로 전소된 유산 중 사남고택은 다행히 3D기록화 작업이 완료돼 있어서 원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청송 덕천마을 송소고택. 조선 영조 때 만석꾼 심처대의 7대손 송소 심호택이 1880년 파천면 지경리 호박골에서 조상의 본거지인 덕천마을로 옮겨왔다. 지금은 체험형 숙박시설로 개방 중이다.
파천면 덕천마을의 송소고택은 조선 영조 때 만석꾼 심처대의 7대손 송소 심호택이 1880년 파천면 지경리 호박골에서 조상의 본거지인 덕천마을로 옮겨오면서 건축한 99칸 집이다. 각 건물에 독립된 마당이 있는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덕천마을은 청송 심씨의 오랜 세거지이다. 청송 심씨는 시조 심홍부의 증손인 덕부·원부 때에 조선 건국을 두고 경파(京派)와 향파(鄕派)로 갈라진다. 형 심덕부는 이성계를 도와 새 왕조를 여는 데 공을 세웠고 후손들 중에서도 정승, 왕비가 많이 나왔다. 동생 심원부는 새 왕조를 거부하고 두문동에 은거했으며, 세 아들을 고향으로 내려 보냈다. 그 후손들이 청송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았으며, 덕천마을로 들어온 것은 약 500 년 전의 일이라고 한다.
지역 고택들 중에는 후손들이 서울에 뿌리내리면서 고향의 고택들이 비어있는 경우도 많다. 송소고택도 1980년대부터 20여년간 빈 집으로 있었다. 도둑들이 들어와 현판이며 문을 뜯어가기도 했고, 집터는 잡초가 뒤덮었고 담장을 허물어졌다. 2002년 국비를 지원받아 깨끗하게 새 단장을 했으나 송소의 증손인 심재오씨는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올 형편이 되지 않았다. 집을 닫아 놓으면 또 도둑이 들어 문짝을 비틀고 엉망으로 만들어놓을 것 같아서, 2003년 지인에게 체험형 숙박시설로 개방해 운영하도록 했다. 그 후 55세 때인 2010년 서울 일을 정리하고 부인과 함께 고택으로 내려와 지금까지 관리 운영을 하고 있다.
2011년 한국관광의 별로 선정된 송소고택을 비롯해 덕천마을에는 초전댁(1806)을 비롯해, 심호택의 차남 송정 심상광의 살림집인 송정고택(1914), 창실고택(1917), 찰방공종택(1933) 등 여러 고택에서 한옥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다.
초전댁 주인 심상민씨는 "나이 든 분들보다 젊은 층 한옥 마니아들이 많이 찾는다"며 "화장실이 밖에 있어서 불편할 수도 있지만 고택에서는 잠이 잘 오고 깊이 잘 수 있어 좋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송소고택 심재오씨는 "대지가 넓어 잡초관리에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주인 혼자 감당하기 힘들다"며 "시니어클럽 공공일자리 사업으로 문화유산 관리를 지원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김광재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 - 청송군>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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