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상준 수필가·대구문인협회 부회장
일요일 아침이다. 핸드폰 벨이 울린다. 상주에 사는 죽마고우(竹馬故友)다. 친구의 전화 속 첫 말이다. "준아, 건강하지. 이제 너하고 나만 성하지, 다른 것들(친구)은 성치 않아" 하며 너스레를 떤다. "왜 무슨 일이 있느냐?" 하니, 누구는 다리를 다쳐서 걷기가 불편하고, 누구는 뇌출혈로 요양병원에 가 있고 누구는 간암을 앓다가 벌써 저승에 갔단다. 나도 근황을 알고 있는 어릴 때 죽마를 함께 타고 놀던 친구들 소식을 전한다. 마지막 말이 걸작이다. 어디 큰 싸움에서 승리자가 된 듯 "이제는 다 필요 없다. 건강이 제일이다" 하며 목소리를 한껏 높인다.
어릴 적 고향에서 함께 놀던 친구들 모습이 흑백 영화처럼 머릿속을 스쳐간다. 전화 속 친구와 나는 마치 형제나 된 것처럼 사이좋게 지냈다. 또래들과 싸움이라도 할 때면 힘을 합쳐 상대방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몸집이 작아도 싸움을 잘했다. 박치기 명수다. 싸움엔 선수를 쳐서 상대를 기습하는 자가 이기는 법이다. 싸울 때마다 상대를 노려보다가 그의 면상을 머리로 받아 코피를 쏟게 하고는 공격한다. 때로는 싸움 상대가 기운이 세 밀리기라도 하면 어느 틈에 쏜살같이 도망가 버린다. 삼십육계 줄행랑이다.
오랜만에 온 친구의 전화가 유년 시절의 꿈을 일깨운다. 가만히 생각하니 그때 꿈꾸던 것들이 하나 이루어진 것이 없다. 가난해도 친구가 있으면 즐겁고, 유복해도 친구를 잃으면 괴롭다. 괴로움 안에도 즐거움이 있고(苦中樂), 즐거움 안에도 괴로움이 있다(樂中苦). 자유로운 마음으로 남은 인생길을 조심조심 한발 한발 걸어갈 뿐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친구의 말대로 아직은 건강을 지키고 있다. 건강해야만 사랑도 있고 행복도 있고 즐거움도 있다.
누가 말하지 않았나. 사람이 하고자 하는 욕망은 세상에 없는 것을 바라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꿈을 이루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순리대로 살아갈까 보다. 유년 시절의 바람이 나의 능력으로는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고 자위해본다. 그때의 꿈은 지우개로 깨끗하게 지우고 그 자리에 조화로운 마음가짐을 유지하고 실현 가능한 삶을 찾아 소박하게 살까 보다. 덧없이 지워진 자리에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 몇 소절이라도 채워지기를 바라면서…. 그래, 지금까지 건강을 지키고 있음도 삶의 보람 아닌가. 친구도 동의하는지 전화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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