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현주 대구미술관 커뮤니케이션 팀장
"어둠 속에 네 얼굴 보다가 나도 몰래 눈물이 흘렀어. 소리 없이 날 따라오며 비춘 건 finally 날 알고 감싸준 거니" 형광 노란 바탕 위, 아이들이 쓰는 알록달록한 스티커 글자들이 삐뚤빼뚤 붙어 있다. 보아(BoA)의 노래 가사다. 2011년 대구미술관 전시에서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때 이명미(1950년생) 작가 특유의 유쾌함을 느꼈다. 밝고 경쾌하고, 놀이처럼 자유로운 색의 향연. 아이들이 쓰는 스티커로 작업한다는 점도 재치 있게 다가왔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작가 작업실을 찾아가 물었다. "선생님, 스티커 좋아하세요?" 그녀는 잠시 미소를 머금더니 이렇게 말했다. "우리 딸이 좋아하던 거예요. 지금은 곁에 없지만, 아이가 가지고 놀던 스티커며 소소한 것들을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그러고는 조용히 서랍을 열어 보여주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때 알았다. 밝고 유쾌하게만 보이던 작품 속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감정이 켜켜이 쌓여 있었는지를.
삐뚤빼뚤한 글자들 사이 딸과의 시간이 스며 있었고, 형광빛 바탕 아래에는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이 깔려있었다. 그녀의 '놀이'는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상처를 품은 회복의 언어였다.
1970년대 한국 미술계가 단색화의 절제된 미학으로 가득할 때, 이명미 작가는 그 틀 바깥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펼쳤다. 스펀지, 비닐, 플라스틱 같은 낯선 재료를 사용해 회화를 진지함으로부터 해방했다. 이명미의 화면엔 원색의 색들이 부딪히며 흔들리고, 기호와 문자, 낙서가 뒤섞여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냈다. 그 질서가 완벽하지 않아 오히려 더 인간적이다. 그녀는 '놀이'라는 단어로 예술을 정의했고, 그 태도 속에서 '삶을 견디는 법'을 배웠을지도 모르겠다.
살다보면 우리는 너무 쉽게 굳어진다. 모든 걸 계획하고, 의미를 부여하려다보니 유연함을 잃는다. 그럴 때 이명미 작가의 작품 앞에 서면 마음이 느슨해진다. 삶을 조금 틀어도, 색이 번져도 괜찮다고 위로하는 듯 하다. 작가는 최근 대구미술관 '이인성미술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더욱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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