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일 논설실장
레빗과 마틴이 경주 황리단길로 마실 나왔다는 뉴스가 떴다. 캐롤라인 레빗, 그는 누구인가. 트럼프가 애지중지한다는 역대 최연소 백악관 대변인이다. 1997년생, 28세로 MZ세대이다. 속사포 언변을 구사해 영어 듣기 공부에 최적이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레빗 옆의 마고 마틴은 트럼프의 소셜미디어를 총괄하는 커뮤니케이션 담당 특별보좌관이다. 1995년생. 두 여성은 미국을 위대하게(MAGA)를 주창하는 트럼프 최측근이다. 그들은 황리단길에서 젤라또를 먹고 한국화장품을 구매했다.
일주일여 전 오래만에 APEC 준비가 한창인 경주로 나들이 갔다. 황리단길은 대구 동성로만큼은 아니지만 종종 온다. 주말이면 늘 북적된다. 신라시대 건물일 리는 없지만 촘촘한 기와집을 개조한 카페, 나와 상관은 없을 듯한 기념품 가게의 모든(modern)한 실내분위기는 담장 넘어 대릉원과 절묘한 대비를 이룬다. 대릉원 그곳이 어떤 곳인가? 조선 왕릉처럼 신원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신라 왕과 귀족의 무덤들이다. 경주 시내는 온통 왕릉인데 감탄하지 않는 외국인이 없다. 우린 가을밤이 저물어가는 황리단길 끝자락, 왕릉이 훤히 보이는 신생 한옥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산등성이를 닮은 릉은 조명을 받아 엷은 황금색으로 찬란하다.
동궁과 월지의 야경. 사진 아래, 관광객들이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다.
"박 기자! 아니 동궁(東宮)과 월지(月池)를 가봐야지요. 밤에 봐야 해요. ···" 일전에 경주에 갔다가 동궁 정문 앞에서 돌아나왔다 하니, 경북문화관광공사의 김남일 사장이 탄식하며 한 말이다. 이제사 그의 권유를 실천했다. 낮에 한번, 야간에 한번 들렀다. 내가 무식한지 모르겠다. 월지는 그 옛날 초등학교 시절 수학여행에서 처음 접한 안압지(雁鴨池)의 다른 이름이다. 조선시대 방치되다 기러기(雁)와 오리(鴨) 놀이터가 돼 붙여진 별칭이다. 야간의 동궁과 월지는 인산인해다. 절반이 외국인 듯하다. 핸드폰 카메라를 모두 시도 때도 없이 들이댄다. 연못속에 깊이 비친 나무와 전각 벽면은 영화 어비스 혹은 아바타의 그 장면 같다. 설명할 길이 없다. 직관해야 안다. 안압지에서는 포석정처럼 역시 술잔이 돌았나보다. 실제로 '주령구(酒令具)'란 놀이용 주사위 같은 것이 발굴됐다.14가지 벌칙이 적혀 있다. 술 3잔 마시기, 춤추며 노래부르기 등등... SK회장이자 APEC CEO 서밋 의장인 최태원은 "왕과 신하들이 술을 마시며 아이디어를 교환하던 곳"이라고 고상하게 말했지만.
동궁은 신라 왕궁 동쪽에 있던 세자의 궁궐이다. 궝궐 내 정원 연못이 월지. 한때 압압지로 불렸다. 야경이 압도적이다. 밤에 봐야 한다.
나의 본관(本貫)은 '경주 월성 박가'다. 경주가 친근한 이유이기도 하다. 난 그날 월성, 혹은 반월성(半月城)이라고도 불리는 그곳을 한 바퀴 돌지 않았다면 계속 경주의 절반의 절반도 몰랐을 것이다. 무심코 올라 산책한 월성은 북쪽으로 경주시내가 훤히 보이고, 아래에 첨성대가 자리했다. 남쪽 절벽 아래 남천이 흐르고, 북쪽으로 해자를 복원했다. 앞에 걸어가던 백인 처자는 핸드폰 거치대를 치켜세우고 계속 찍어댔다. 여기는 단언코 '케데헌'에 나오는 동대문 서울 성벽 보다 덜 정교하지만 더 웅장하고 장쾌하다.
경주 월성과 낙조. 토성 아래 해자를 만들었다.
카페에서 자리를 뜨면서 교촌마을 밤길을 걷기로 했다. 인종 구분이 잘 안되는 외국인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달빛인지 가로등 빛인지 모를 조도가 기와집 위로 흐른다.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트럼프가 황리단길 마실을 나왔거나 동궁과 월지, 교촌마을을 거닐었다면 관세협상에서 그렇게 고자세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300년 역사도 안 된 나라의 대통령이 이미 천년 전에 천년의 세월을 휘감은 공간에 섰다면 감히 쉽게 윽박지를 수 없었을 게다. 천년을 잠자던 경주는 지금 땅속에서 솟아나고 있다. 아름다운 경주다.
경주 최부자집 동네, 교촌마을 밤길.
백악관 MZ측근들, 경주 마실
안압지로 알려졌던 동궁과 월지
케데헌의 장면, 그 이상의 월성
트럼프 2천년 경주를 거닐었다면
관세협상에서 고자세 버렸을 것
박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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